교회에서는 '구원'이 곧 죽어서 지옥과 대비되는 곳인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앞의 글들에서도 말했듯이 성경은 사후세계를 명확히 그리거나 죽음 이후의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성경에는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뭔가가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은 그보다 '하나님 나라', 즉 성경에서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가 구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왕권, 통치, 나라를 의미하는 '말쿠트'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데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테우'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데 이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형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에 구체화되어있지 않고,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사후세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내용은 철저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 역시 현재적 관점에서 현실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지점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 나라는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드러나게 되며, 그렇게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이 땅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가 회복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은 '우리 마음, 생각과 가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생각과 가치라는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갖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십계명에서 1-4 계명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두지 말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보다 우선순위에서 위에 두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신'과 '우상'은 다른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욕구하고 욕망하는 어떤 것도 신이나 우상이 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은 물론이고 결혼이나 신앙심과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사랑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신점은 악한 영이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면 안 되지만 사주는 통계니까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람들이 왜 사주를 보는가? 결국은 자신이 욕구하고 욕망하는 바를 이루고 싶어서, 자신에게 우상인 게 있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에 미래를 알고 싶은 욕구와 욕망 때문에 보는 것이다.
그렇게 사주를 봐서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것과 눈이 밝아져 신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건 다를 바가 없다. 앞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믿음이 있다면 모르더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더라도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이나 방법을 통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곧 자신이 신이 되고, 자신의 욕구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아무 곳에나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지 말란 것이다. 교회라고 이름이 붙여진 곳이라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고, 목사로 안수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은 아니다. 십계명은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있다고 말하지도, 믿지도 말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행동하거나 말하는 동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그게 곧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것을 이 계명은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면 그 사람의 행동은 당연히 달라지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신앙은 좋은데 사람은 좀 이상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다. 진짜 신앙이 있는, 그 사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자리 잡은 사람은 절대로 행동이 바뀌지 않을 수가 없다. 교회와 사회에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은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없으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해서 외국인이 한국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 하나님을 입으로 외치지만 삶이 엉망인 사람은 교회는 다닐 수 있어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신앙은 껍데기만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십계명에서 5 계명부터 10 계명까지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거하면 어떤 행동이 나오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 6개의 계명의 핵심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욕구하거나 욕망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읽어보면 누군가의 안에 '하나님 나라'가 거하게 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구현해야 할 목표로 설정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구원을 하나님과 단절되어 죄 속에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경은 누군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삶의 기준이 달라지게 되며, 자연스럽게 그 삶도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범죄(crime)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것(sin)을 의미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창조'의 문제를 과학과의 대결 구도로 그리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성경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본래 만든 형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창조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만드셨나? 하나님의 형성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어떤 모습이 내재되어 있을까? 그런 선함과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모습에서 멀어져 간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고, 구원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과 질서를 우리의 삶과 사회에서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면서 열매를 맺으며, 그러한 열매들이 모였을 때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보다 사회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좌절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변화가 없으면 겉으로 선해 보이는 시도도 결국은 자신의 성취욕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같아도, 그 뿌리가 다르다면 그 열매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한 사람의 구원 없이 시도되는 사회적, 법적, 정책적 변화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구원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창조되었던 모습에서 벗어난 죄인이고, 죄인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개신교와 성경이 이처럼 '내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라면 결국 불교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지 않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개신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개신교는 그러한 변화의 주체가 절대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전제하는 데 있다. 다른 종교는 수행과 행실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하지만, 개신교에서 사람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구원, 즉 변화된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고, 그런 변화도 매일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지속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종교는 '비움'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채움'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이 분명히 다르며, 다른 종교는 속세를 떠나서 일정한 경지에 이를 것을 요구하지만 개신교는 철저히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이 득실대는 사회 안에서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욕구와 욕망이 가득한 사회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며,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착각하고 있고, 많은 개신교 신자들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한 가지는 이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만든 국가를 통해 만들어져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개신교 신자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서 인구를 늘려야 한단 말이 나오는 것이 사람들의 그러한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신실한 개신교 신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개신교 신자가 된다는 보장이 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수많은 곳에서 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이를 낳아서 숫자가 담보되어야만 일하실 수 있는 존재인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바울을 바꿔서 쓰신 분이다. 이 땅에서 인간이 만든 국가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인은 지금 당장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도, 앞길이 막막해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상상하지도 못할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면서 이뤄나가실 것을 믿고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과 삶, 그리고 속한 영역에 집중해서 그 안에서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리고 그 뒤의 세계는 하나님께 맡겨진 것이고 인간은 알 수 없다고 전제하는 것이 개신교적인 관점과 해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는 건, 인간은 사후세계에 대해 절대로 완전히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내 마음에서조차 하나님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 죄인인 인간에게 너무나도 버거운 과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