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대한 오해

by Simon de Cyrene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힘들면 그것을 '고난'이라고 정의하고, 자신의 위치를 '광야'로 분류한다. 그 사람이 정말 고난을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고, 광야를 지나는 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보다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광야는 단순히 힘든 시간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로 있을 때, 그리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뒤에는 행복하기만 하고 힘든 일이 없었나?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 쏟아내는 말들과 출애굽기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 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건 뒤의 글에서 다룰 예정이니 일단 그 얘기는 여기에서 정리하자.


광야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없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머문 40년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먹고, 마시고, 심지어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는 지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결정해야만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어쩌할 바를 모르며 '이럴 거면 그냥 살던 대로 살 걸 그랬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과 공간. 그게 바로 광야다.


올해 초에 나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이제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어머니는 곧바로 아닌 것 같다고 하시더라. 내 삶에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시선에서 내 삶은 여전히 광야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내 인생에서 지난 10여 년을 광야로 규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가족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내가 두 번째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했을 때 내가 방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고 다른 약속도 거의 없는 상태로 집에서 문 닫고 공부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온 뒤 부모님은 '너 그 안에서 공부한 것 맞니?'라고 물어보시더라. 내가 시험에 계속 떨어지자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은 공부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말라고, 한 가지에 집중해야 결과를 받을 것이 아니냐고 나를 책망했다. 그들은 내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모르기 때문에 했던 말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밖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사람들을 만나도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만 느끼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으니까.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의 불합격을 경험하는 걸 옆에서 직접 본 찬양팀 팀원들이 어떤 위로도 말로 하지 못하고 나를 안아주고, 어깨를 '툭' 치고 가는 것에서 가장 큰 위로를 느꼈다. 찬양팀 전체가 내 아픔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다는 걸 느꼈을 때 그 마음에 감동과 위로를 받아 눈물을 흘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여기 까지란 사실에 한계도 경험했다.


다른 사람들은 왕성하게 일하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며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다양한 관계도 형성할 때 나는 오로지 골방에서 공부를 하며 생계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만 해야 했다. 그런데 큰돈을 받지도 않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위해 공부할 시간을 쪼개며 일을 하고 난 뒤에는 내 실패로 인한 아픔을 조금이라도 바라보고 배려해주기는 커녕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기간으로 내가 일하지 않았단 이유로 '걔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라는 말을 내가 사랑했던 어른이 했단 이야기에 나는 좌절감을 느꼈고, 지금도 그 상처로 인해 그 공동체엔 발을 들이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불합격이란 결과를 받은 다음 날에도 마음이 추스러지지 않는 상태에서 감정을 누르며 일을 하기 위해 출근했었다. 이 역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이다.


누구도, 나를 이해해 주거나 위로해주지 않았고, 못했다. 그런데 또 내가 원하거나 바라지 않는 일들은 잘 되더라. 박사과정에는 지원한 학기에 총점에서 2등으로 합격해서 입학을 하고, 내가 하고 있던 일 중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일을 포기하려고 하면 포기하려고 했던 영역의 일이 갑자기 들어와서 나는 너무나도 성격이 다른 일들을 여러 가지 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사람들은 재능이 다양해서 모든 일을 기본 이상은 하다 보니 집중을 못해서 방황한다고도 했는데, 나는 정말 생존하는데 돈이 필요해서 그 일들을 했을 뿐이다. 누구도 악한 마음을 갖지 않았음에도 내게는 오해가 그런 방식으로 계속 쌓여만 갔다.


그런데 또 그 과정에서 나는 굶지는 않았다. 내가 지원한 건 다 불합격하는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일을 시작하게 되고 일 년을 돌아보면 정말 정확히 내가 먹고사는 데 필요한 만큼의 수입만 들어와서 통장잔고에는 큰 변화가 없는 30대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20대에 처음 받았던 보너스를 포함한 연봉을 몇 년간 동안 벌 수 있었다.


하나님께 울부짖고, 당신이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수천 번도 더 따졌다. 일주일 정도는 진지한 무신론자가 됐으나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무너져 내리기도 했고, 정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내 힘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며, 정말 하나님만을 붙들 수밖에 없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아직도 더 내려가야 합니까'와 '이 터널의 끝은 어디입니까'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도하며 외친 적도 있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광야를 지나온 지금, 나는 그 시간을 고난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그 시간 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그 상황이 객관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욕구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내 마음 때문이라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기준이 바로 서 있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면 지금 당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없어도 나는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보다 나의 사회적 평판과 성공이 더 중요했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는 결핍과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그게 어떻게 고난이고, 하나님 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작은 예수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와 상반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세상과 사회, 사람들이 가하는 조치들로 인해 겪게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이다. 이 땅에서 진리와 복음을 선포하고,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활동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이,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에서 그대로 전했음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권력자들이 예언자들에게 가했던 폭력들이 고난이다.


우리는 중심이 바로 선 상태로,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야 비로소 고난을 받게 될 수 있기에 내가 경험한 고통은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아니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고난'이라고 부르는 일들도 대부분이 그렇다. 이는 그들은 대부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갖지 못함으로 인해 힘든 것을 고난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광야에서의 시간은 축복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내 앞길을 막고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하나님은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계셨다. 작년 하반기에 많은 것들이 현실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정리되면서 여유가 생겨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모임을 가지면서 나는 그걸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꼈다.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준과 가치가 나의 그것과 너무 다르고, 그들이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도 다르더라.


그들이 이상하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들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고,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내가 순진한 것을 넘어서 너무나도 이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이렇게 나이브 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라고 스스로 수도 없이 되물었는데 그건 역설적이게도 내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기 때문이더라. 그리고 작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내 안에서 드는 마음과 반응을 보며, 내가 광야에 들어가기 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 가장 큰 차이는 이제는 불확실성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덜하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욕구와 욕망하는 것을 쫓으려는 마음이 내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당장 나는 올해로 내가 강의하는 대학들 중 한 곳의 강사계약이 만료되고 법적으로 연장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함에도 그에 대한 불안함이 없고, 내년에는 어떤 일도 보장되지 않은 프리랜서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오히려 들어오는 일들도 거절하며 한 걸음 물러나 내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비웠다. 40대 중반에 통장에 잔고도 많지 않고, 서울에서 월세를 살고 있는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아는데 이 결정이 어렵지도 않고 마음에 불안함도 없다.


광야에서, 광야학교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었고 마음에 근육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40년간 광야에서 헤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타락한 것은, 하나님과 독대하고 은혜가 부어지는 시간인 광야를 경험한 뒤에도 인간은 다시 본인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좋은 몸을 만들었어도 1-2개월만 운동을 쉬면 근육이 빠지고 지방은 늘어나듯이, 하나님과 1대 1 시간을 수년간 보냈어도 인간은 매일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박는 삶을 살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회귀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 두고 흔들리긴 해도 무너지진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할지도 모른다. 맞다. '제정신'이 일반적인 사람과 같은 사고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미친 게 맞다. 그런데 내 상황이 바뀐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 몇 달을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고, 내 통장 잔고가 훨씬 풍족했던 20대 후반 때보다도 행복하며 불안하지 않다. 미쳤어도, 이렇게 곱게 미쳤다면 미쳐볼 만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내게 20대 후반으로 돌아가서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똑같은 광야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아봐도 그렇고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때가 얼마나 편하고 하나님의 두 날개 아래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았던 것인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군대에 있을 때는 나가기 위해 날짜를 매일 세지만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해보면 군대 안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던 시간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내가 힘들다고 해서 내가 광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광야는 힘든지 여부가 아니라 다른 것은 다 잘라내지고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거나 볼 수가 없고 세상이 다 등을 돌린 상태에서 하나님 외에는 보거나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힘든 건 그저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진짜 광야를 지금 지나고 있다면, 나는 당신이 그 시간을 잘 버텨내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 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광야의 시간은 엄청나게 큰 선물이자 축복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도,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광야가 광야인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그 시간은 언젠가 끝나고, 그 시간이 끝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 시간이 끝이 났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가나안 초입에 들어선 내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뒤에 경험하게 되는 세상은 광야에 들어서기 전보다 훨씬 크고, 놀랍고, 아름답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다고 생각될 거고 그건 맞는 생각이다.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업고 그 시간과 공간을 건너가실 것이다. 나처럼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약한 사람도 정신과 치료 한 번 받지 않고 그 길을 건넜으니, 당신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세상보다 크시니까.


그걸 경험하고, 지나고 나서 알게 되는 시간과 공간이 광야다. 그리고 광야는 다시 말하지만 축복 중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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