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 때 앞의 글에서 설명한 '광야'에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가기 전인 이집트나 광야를 지나 들어간 가나안에 있다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이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결과와 함께 '나는 훈련받고 있어'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아니다. 앞의 글에서도 수차례나 반복해서 말했지만 내가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게 곧 훈련을 받고 있는 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 때 고난이 찾아오고 그 고난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건 맞다. 하지만 고통스럽다고 해서 그게 곧 본인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고, 하나님이 그 고통의 원인이며, 자신이 광야의 길과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으로 가득 차서, 그런데 그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생각해 보자. 광야에 들어가기 전인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복했나? 아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다.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어땠나? 구약에서 출애굽기 이후의 책들은 모두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고통이 없었나? 이집트에서도,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늘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 둘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광야에 들어가기 전의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해 보자. 요셉이 세상을 떠난 뒤, 모세가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은 약 300년 전후로 보통 추정된다. 300년이 지나면서 이집트 사람들은 요셉에 대해 잊어버렸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경도 없었던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은 당연히 자신의 조상인 요셉과 함께 한 여호와라고 불리는 절대자인 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은 고통스러운 하루, 하루 속에서 먼 미래나 큰 그림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자신을 위해서 이집트 사람을 살해한 모세에게 고마워하거나 그에게 구원의 기대를 걸기는커녕 그를 원망할 정도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 형식적으로 교회는 다니지만, 그러한 자신의 현실에 하나님이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없이, 당장 그 현실 속에서 조금 더 돈을 잘 벌고,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은 가치를 목표로. 그런 사람들은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더 큰 하나님과 더 큰 가치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찬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욕구하고 욕망한다면, 그 안에는 경쟁이 있을 것이고 그 경쟁을 이겨내고 원하는 바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힘든 시간을 버텨내며 때로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이 힘들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똑같은 경험을 더 고통스럽게 여긴다. 자신은 교회에도 다니고, 헌금도 내고, 봉사도 하니까 하나님은 자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고 믿는데 그게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에. 반면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헛된 기대는 하지 않고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덜 힘들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착각이다. 3-4살짜리 어린아이가 부모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그 무엇도 드릴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존재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뭘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삼성에 다니는 직원이 이재용 회장에게 삼성 핸드폰을 선물할 수 있나? 선물한다고 한들, 그게 이재용 회장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께 '내가 이토록 수고했으니 내가 원하는 걸 주시오'라고 하는 건 마치 삼성전자 직원이 이재용 회장에게 '내가 당신에게 삼성전자 핸드폰을 줬으니 내게 집과 차를 주시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게 말이 되는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사실은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그렇지 않은 척하며 한 편으로는 하나님과 딜을 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은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진 상태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함으로 인해 힘들어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시험이라 여기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이라니... 당신이 신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성경에서 출애굽기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앞의 글에서 내가 광야를 지나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했지만, 실제로 광야를 지나온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곧 달라진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성'은 광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어도 인간이 광야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우선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게 있다. 여기에서의 '죄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범죄의 개념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나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를 죄인이라고 하나?'라며 이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영어로 sin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사람들이 억울해 하는 ‘죄인’에 사용되는 위미의 '범죄'는 영어로 crime이다. 범죄는 개인이 다른 개인이나 사회, 국가에 해을 끼친 것에 대해 처벌할 대상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인 sin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경과 기독교에서 인간의 목적은 그 창조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는 것으로 설정된다.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 것도, 대형교회 목사가 세습을 통해 재산을 대물림하려는 것이 죄인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면, 광야를 잘 지나온 사람도 그 안에 있는 죄성의 영향으로 인해 매일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내려놓고 기도와 말씀으로 바로 서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광야에 들어가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이 구원받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고,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구원파의 교리가 이단인 것은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러한 원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뒤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나? 그들은 광야에서 자신의 조상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살았다. 그들은 편할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욕구와 욕망의 노예로 살았고, 힘들 때만 하나님을 찾으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출애굽기 이후 구약의 책에서는 그러한 패턴이 반복된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셨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엇나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며 돌아오라고 설득하고, 협박했다. 그리고 정말 안 되겠을 때, 되돌이킬 수 없을 때는 그들이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서 심판을 하기도 하셨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당신의 자녀가 마약에 중독되어 있고, 마약에 찌든 상태로 누군가를 죽이려고까지 했다면 당신은 그 자녀를 어떻게 대하겠나? 남경필 전 국회의원은 마약에 중독된 아들을 직접 고발했다. 자신의 아들을 혐오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에, 그렇게 해야 그가 마약중독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약 근절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듣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다면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사람들은 설득하고, 협박하다 심판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만 보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렇게 협박하고, 심판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내가 어렸을 때 잘못을 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세워놓고 '몇 대 맞을래?'라고 물으시고 내가 말하는 만큼을 골프채로 종아리를 때리셨다. 그때마다 내 종아리는 피멍이 들었고,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어머니는 약을 들고 내 방에 따라 들어오셨다. 누군가는 '어떻게 아들에게 골프채를 들 수 있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게 자연스러웠고, 나 또한 그로 인해 아버지에게 악감정을 갖거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약을 들고 들어오신 어머니께 나는 상처가 오래가야 내가 내 잘못을 오래 기억할 것이 아니냐면서 약을 바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뒤로 나는 완벽한 삶을 살았을까? 그랬을 리가...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가 잘못을 할 때마다 골프채를 드신 것은 아니다. 소소한 잘못은 어머니 선에서 해결됐고, 아버지는 정말 큰 잘못을 했을 때만 그렇게 매를 드셨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회개하고 나서 상황이 괜찮아지면 다시 하나님과 멀어졌고, 다시 힘들어지면 또 하나님을 찾았다. 그때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언제나 받아주셨다. 그게 사랑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자녀가 도를 넘으면 부모가 자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처럼 광야에 있지 않아도 인간은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성경은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아와 욕구와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명예, 권력과 돈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도. 여기에 더해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언제든지 받아주시며 회개만 하면 모든 것을 잊어주시겠다고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명예, 권력, 돈을 가지면 행복해지는가? 그런 것들이 주는 순간, 찰나의 만족감과 행복이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돈을 목표한 만큼 벌고 나면 더 벌고 싶은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그렇게 원하던 대학에 가고, 원하는 직장에 취업해도 그로 인한 행복과 즐거움이 1년 이상 가는 경우는 드물고,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과 결혼했다고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그런 것들로 채워질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연예인들이 시상식이나 콘서트가 끝나고 나면 허무함을 느낀다는 것도 똑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광야는, 그런 것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음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 경험을 기억하며 하루, 하루를 살면 우리는 그 경험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가치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상충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는 필연적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럴 때 하나님 손을 놓고 타협을 하는 순간 우리는 출애굽기 이후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고, 그 시간을 버텨내면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와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간 길을 가는 것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면 엄청나게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내 편인 파트너와 아이가 주는 그보다 더 큰 기쁨, 행복과 안정이 있듯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경험하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복, 기쁨과 행복이 있다.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힘들고,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나지막이 기도한다. I choose you God.이라고. 신앙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가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