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해를 해야 암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숲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숲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를 잘 보지는 못한다. 그래서 항상 큰 틀에서 뭔가를 보기 위해 노력하고, 그 큰 틀이 머리 안에 그림으로 들어온 뒤에는 디테일들을 어렵지 않고 파악하는 편이다.
그런데 20대가 법학을 이해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법률체계는 사회, 경제, 문화, 역사, 정치가 결합되어 있고 법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이해도가 최소한의 수준으로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20대에 나는 계약서라고는 공채로 대기업에 입사할 때 단체로 앉아서 서명을 할 때와 학부시절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 그리고 자취방을 구할 때 임대차계약 정도를 봤던 것 이상으로 법적인 이슈를 접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내가 로스쿨에 진학했을 때만 해도 법대시절의 문화가 교수님들께 남아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수업을 하는 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고 피드백이 갈 수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교수님들 중에는 한 학기에 정해진 진도를 본인이 가르쳐야 한단 책임감을 갖지 않으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 수업시간 내내 본인이 생각하는 극소수설인 학설만 설명하고 나가는 교수님부터 수업과 관련 없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본인 생각만 말하다 나가시는 교수님까지. 학부시절에 다른 전공을 한 입장에서 접한 적 없는 황당한 수업들이 있었고, 학생들은 그런 수업을 피하기 위해 수강신청 기간에 수강신청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젊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가르쳐 주는 교수님들은 우리 윗기수에서 수업을 하셨고 우리는 그 외 교수님들이 주요 수업을 많이 맡으셨다. 그러니 안 그래도 이해하기가 힘든 법학이 더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그런 상황에서는 요령껏, 교수님들이 쓰신 교과서가 아니라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암기할 수 있게 정리되어 있는 수험서들을 중심으로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또 고지식한 면이 있는 나는 수험서는 볼 수 없다며 제대로, FM대로 공부하겠다고 우기며 명저로 평가받긴 하지만 누구도 수험용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책들로 공부를 했다.
잘못된 공부방법이었다. 시험에 붙을 수 없는. 동기들은 나를 걱정했고, 나는 시험점수를 잘 받지 못해도 기본과 기초를 단단하게 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방법을 고수했다.
지금 돌아간다면 그렇게 공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법학과 같이 전체 시스템을 한 바퀴 정도는 돌아야 큰 틀이 머리에 들어올 수 있는 영역에 대한 공부는 일단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반복해서 나무부터 봐야 한단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내 방식대로 20대를 살며 내 또래들 중에선 연봉도 높은 편이었고, 내가 목표한 바는 이뤘다 보니 고집을 부렸다. 내가 성공했던 방식이 이번에도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었다. 내가 틀렸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변호사, 판사, 검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학계로 가서 학교에 남기 위해서는 변호사 자격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교수님들의 조언을 듣고 반드시 로스쿨을 졸업한 뒤 '5년 이내' 안에 봐야만 하는 변호사시험을 보면서도 인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얄팍하게 시험 하나에 붙기 위한 공부는 하지 않겠다며 내 방식을 고수했다.
그랬던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 당장 변호사시험을 합격하기 위해서는 내가 했던 방식으로 공부를 해서는 안되었던 건 분명하지만 내 방식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내가 경험하고, 받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 내가 그때 타협했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지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면 나는 그 길을 갔던 사람들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길을 간 사람들'의 특징은 분명하다. 법학은 필연적으로 '법학체계 안에서' 사고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상식이나 자신의 경험과 느낌으로 반응하지만 법학을 공부하고,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은 법이나 그와 유사한 체계부터 찾는다. 그리고 그 체계나 세상 안에서 사고한다. 그렇다 보니 법률가들은 굉장히 논리적이기는 한데, 그들은 반대로 그 틀 밖을 볼 줄도 모르고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정답이 있는 삶을 살며 그 정답을 맞히며 살아온 법률가와 법조인들은 정답이 없는 세상에 대해 이해하지를 못하는 경향도 매우 강하다.
그래서 법률가와 법조인들은 갑갑하고 폐쇄적인 면이 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판결들이 꽤나 자주 나오는 것도 사실은 그런 법조인들의 특성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 법조인들은 주로 법조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나 자신들이 경험한 세상을 이해하거나 그런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한다. 그리고 틀 안에서 주어진 도구로 논리를 구성하다 보니 어떠한 악한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판결로 나오기도 한다.
그게 나쁜 게 아니다. 법은 보수적이어야 하고, 이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틀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기에 법조인과 법률가들은 그렇게 사고해야 한다. 다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 그 틀을 운용한다면 현실과 틀 사이에서 타협되고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부분들이 있을 텐데 변호사시험 합격률이 고정되어 있어서 상대평가가 이뤄지는 현재의 제도 하에서는 사법고시 때와 마찬가지로 학부에서 공부만 한 사람들이 주로 로스쿨에 진학하다 보니 그 타협과 조화가 이뤄지는 법률가와 법조인들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내 방식을 고집하다 실패한 경험은 내게 사고의 유연성을 선물해 줬다. 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대화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예전보다는 내 생각이나 방향성이 비판을 받으면 상대가 틀렸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나 자신부터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간 고지식하게 기초와 기본부터 다지는 훈련을 하다 보니 새로운 영역을 접해도 그런 습관이 유지기 되는데, 법학처럼 수험용으로 정해진 기간 안에 상대평가에서 승리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라면 이런 성향이 한 분야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내가 타협을 했다면, 다른 영역에서도 습관적으로 타협하고 당장 눈앞의 성과만 신경 쓰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그 지점에서 타협을 했다면, 나는 나를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난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지는 그때도 관심이 별로 없었고 지금도 관심이 없다. 나는 로스쿨 자기소개서에서 정책을 만들고, 법제도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책과 법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과 현실을 이해하고 사회, 경제, 문화, 정치영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틀 밖에서 사고하고 틀을 깨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틀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면, 나는 그렇게 사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색깔이 워낙 분명한 나는 그 틀 안에 나 자신을 거두지 못했고, 나는 결국 법학영역에서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기보다는 법제도가 어떻게, 왜 지금처럼 만들어져 있고 어떤 내용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나 자신을 너무 지키다 보니 단기적으로는 실패를 했고, 틀렸지만 결국 장기적으로는 내게 맞는 길을 찾아온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틀을 깨고, 새로운 것을 일단 들여다보는 습성 덕분에 나는 법학 영역 외에서도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 덕분에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가 통한다. 그리고 내 세상은 그만큼 더 넓어졌고, 나는 서로 접점이 없어 보이는 지점들을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항상 틀에 갇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데 결과적으로 나는 '상대적으로'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은 덜 갖고 원하는 것은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에 한 특강을 마치고 한 학생과 대화를 나눈 후 그 학생이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해준 적 없었던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친구가 주위에서 들었던 얘기와, 많은 사람들이 내게 했던 조언들을 맞춰보니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잘못되고 틀린 선택을 하고 있단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그 상황에서만 보이는 기준에 의하면 그들이 맞았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 지금 내가 있는 위치와 상황을 비교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들은 그러다 이도저도 안된다고 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선상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들에 항상 흔들렸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도 수십 번도 더 고려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때는 틀렸던 선택들을 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후회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내 길을 고집하는 게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에 따를 경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게 본인과 맞는지는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민하고,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생각, 특정한 상황에 느꼈던 감정과 내려온 모든 결정들을 반추해 봐야 한다. 그 데이터들을 모아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상대적으로 잘 알 수 있다.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조언의 길의 끝을 내게 맞춰 보면 우리는 조금은 더 우리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뒤에 어떤 길을 가든지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능력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누군가는 그 사람을 알아봐 준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운이 좋게도 많은 게 잘 맞아 들어갔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단 것은 아니다. 서른에는 반드시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싱글에 집도, 차도 없으며 올해는 지인들 중 가장 잘 나가는 사람들 연봉의 1/10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포기했거나 갖지 못하게 된 것만큼이나 가질 수 있게 된 것들이 있다. 지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이 나이에 여전히 꿈을 꾸고, 가슴이 뛰며 설레이는 가능성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단 것 자체가 축복이고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틀렸던 나의 공부방법과 선택은, 지금의 기준에선 맞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는 단기적으로는 틀리고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맞는 선택들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라고 하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나는 이제는 안다. 그리고 너무 쉬운 말이지만 지키기는 힘든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말과 다른 사람에겐 정답이 내겐 아닐 수도 있단 말이 진리와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도, 나는 이제 안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다. 그 길을 선택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