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왜 사랑인가?

by Simon de Cyrene

이 주제로 글을 쓰는 게 힘들다. 오늘날 이 땅에서 한국교회가 과연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거기에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개신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누군가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현상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벌하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타난다.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 위해 부모가 야단치고 체벌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정점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다.


사랑이 뭘까? 사람들은 사랑을 흔히 감정적인 상태로 정의한다. 그런데 적어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 아가페 등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랑'을 관통하는 것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관통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이타성'이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에서 어떤 경우에 감동하고 상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가? 상대가 자신에게 맞춤형 선물이나 배려를 했을 때, 자신의 것은 포기하고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 우리는 크게 감동한다. 내가 지금까지 연애를 하면서 상대를 가장 크게 감동시켰던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당시 만났던 친구의 부모님은 시각장애를 가지고 계셨는데, 나는 '내가 시각장애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네 부모님을 만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실수를 할 거야. 그럴 때 네가 내게 가르쳐 줘야 해'라고 말했는데 그 친구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께 잘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생각하고 고민해 본 게 느껴지는 건 내가 처음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다.


진심으로 상대를 먼저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위한다고 생각했을 때 우린 감동한다. 꼭 이성 간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나 가족 사이에서도. 우리는 언제 상대는 본인 나름대로 위해준다고 하는 것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낄까? 겉으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본인 중심의 해석이나 기준으로 내게 무엇인가를 하거나 줄 때 우린 불편함을 느낀다. 그건 상대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 하면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상대를 이용해서 드러내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인 해석으로 대속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표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 면도 분명히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아내야 할 삶과 길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런 맥락에서도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건, 그런 이타성의 정수에 있다.


아이를 낳은 정상적인 부모들이라면 한 번 이상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죽을 수도 있어'라는 말을, 한 번 이상은 한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 정말로 죽겠다는 건가? 아니다. 아이가 밥벌이를 혼자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건 절대로 아이를 위한 결정일 수 없다. 그 표현은 자신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전달하기 위한 관용적 표현이다.


왜 죽을 수 있다고 할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아무 잘못도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 수 있을까?


개신교 신자의 공통된 목표는 '작은 예수'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개신교 신자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정상'이다. 자신의 필요는 어떻게 채워지냐고?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우리를 우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는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이 개신교 신앙에는 전제된다. 하늘에 나는 새도, 들풀도 하나님께서 먹이고 살리신다는 말씀이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기적인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성립할 수가 없다. 교회에 다니지만 이기적이라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해서 외국인이 한국 국적자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교회를 출석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인 느슨한 의미에서 조차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개신교가 다른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 역시 '사랑'이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신이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는다. 비록 성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의 개념들을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힘들거나 심지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신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건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다른 종교들도 '착한 일, 좋은 일을 해라'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 패턴을 보면 그건 돌고 돌아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느끼고 싶어서 연인에게 명품 선물을 같은 것처럼, 자신이 천국에 가거나 다음 생에 좋은 것으로 태어나고 싶으면 현상적으로 좋은 일을 하라고 대부분 종교는 말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철저히 오롯이 상대를 위해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상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을.


그런데 사람들 간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보면, 인간에게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곧 사랑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가족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만 주려고 하지 않나? 비혼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질 때도 또 한 편에서는 짝을 찾는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바이럴 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결국 사랑이,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은 진화론적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사랑이 얼마나 개인의 생존에 해로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생존본능이라고 불리는 것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인간이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되었다면, 사랑 같은 감정은 사라졌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얼마나 속앓이를 많이 하고 잠들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기도 하는 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불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그건 신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이는 인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곧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과 인간은 모두 그런 존재임을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는 사랑을 빼놓고 설명될 수 없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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