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
이전 글들에서 썼지만 난 노력을 투입하는 것만큼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면 '자살'이란 선택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난 과거에 상당한 숫자의 철학자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에는 그러한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여전히 내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기 위한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힘을 들여서 투입하는 노력의 양과 행복의 양이 비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을 때 그러한 선택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우리 가족과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남은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보낼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를 몇 차례를 거치고 난 지금, 난 그러한 소극적인 이유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어서 내 삶을 살아내고 있다.
소유와 행복
사실 내가 '노력을 투입하는 것만큼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면' 자살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 오는 행복은 그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다 보니 내 주위에는 정말 잘 사는 지인들이 많았고 그 덕에 정말 좋은 것들을 간접 경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가난한 대학원생이지만 30대 초중반에 이미 지인들 중에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넘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아버지께서 중소기업 사장이나 주요 기업의 CEO나 임원을 한 지인들이 주위에 꽤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경험이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의 아들인 내 주위에 왜 그렇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좋은 것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 배경을 가진 지인들이 갖고 있는 좋은 차들도 같이 타봤고, 그들 중 일부가 사는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는 좋은 집에도 가봤으며, 나도 좋은 회사에 다녔던 20대 후반에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갖고 또래에 비해서 좋은 것을 누렸던 적도 있었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공허함이었다. 그것을 누리는 그 순간에는 즐겁지만 그 이후에 찾아오는 공허함, 그리고 그것을 영원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떠올리면 그게 그렇게 행복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연봉이 많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오너가 아닌 이상 그 풍요로움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 한 켠에는 항상 불안감이 있었고 그런 수입이 하루아침에 끊길 경우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가 눈에 들어왔다.
난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런 변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사실 회사를 다닐 때는 어지간한 점심, 저녁 식사를 하는 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회사를 다니며 모은 돈으로 대학원을 가고 나니 학교에서 2500, 3000원 정도 하는 밥이 아니고는 부담이 되어서 사 먹지를 못하게 됐다. 내가 부모님을 부양해야 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회사를 그렇게 오래 다닌 것도 아닌데, 학부시절에는 분명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도 하루, 하루를 살면서도 행복했었는데 7,8천 원 정도 하는 식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현실이 갑자기 비참하게 느껴지더라. 그렇듯 한번 좋은 것을 경험하고 맛본 사람이 그 수준을 낮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경우 2-3년 정도 회사생활을 하고, 겨우 그 정도 차이에 적응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면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소유와 소비 수준이 추락한다면 그 삶은 어떨까? 설사 그렇게 추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지금 '저 정도 가지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수준의 삶을 이루고 나면 행복할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준에 가면 그전에 몰랐던 더 크고 좋은 것이 많이 보일 것이기 때문에. 지하 단칸방에 살다가 지상 단칸방으로 옮기면 단칸방인 게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고, 단칸방에서 방과 마루가 분리된 집으로 옮기면 또 더 좋은 집이 눈에 들어올 것이며, 그 집을 꾸미기 위해서 물건을 사다 보면 그 집이 어느새 좁게 느껴질 것이고, 그런 패턴으로 방 두 개, 세 개짜리로 옮긴다 해도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환경에 적응하면서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위를 볼수록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 한편, 더 많은 걸 가질수록 그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하나의 성취를 이루고 나면 갖고 싶은 다른 게 또 눈에 들어올 것이기에. 만약 개인이 소유하고, 성취하는 것이 무제한적인 행복을 보장해 준다면 왜 백만장자들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오겠나?
행복의 근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소유' 또는 '일체유심조'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와 삶의 안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가능하다면 개인으로서 존중받을 시공간적인 공간이 누구나 필요하다.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버는 사람들이 한 단위의 수입이 증가할수록 증가하는 행복지수는 일정 수준을 지난 이후에 작아진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필요한 소유는 있지만,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만약 내가 뭔가를 더 이루고, 더 많이 갖는데서 오는 행복이 제한적이라면 말이다.
그 고민을 꽤나 오랫동안 했었다. 특히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것을 달성한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을 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가 심각하게 고민이 됐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에 대한 답을 내가 자살할 수 없었던 이유에서 찾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특히 우리 가족이 내 눈 앞에 아른거렸던 영향이 컸는데, 그때서야 사실 우리 인생에서 진짜 행복과 기쁨은 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나를 위해서, 내가 더 갖고 성취하고 갖고 싶은 것에서 오는 기쁨과 만족감은 그 순간에 멈추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지속적인 만족과 행복감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사실 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 어쩌면 너무나도 무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 단체를 통해서 형편이 어려운 국가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후원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난 사실 한두 달 정도는 모든 것을 긴축재정으로 운영하며 살아야 했지만, 내게는 밥 몇 끼에 해당하는 돈으로 한 아이가 한 달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내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따뜻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그건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날 위한 것이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후원을 끊었던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몇 년간 이어져 왔었고, 내가 후원을 시작한 것은 그 가책의 연장선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돕는 것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사실 이처럼 후원이나 봉사를 하고 남을 돕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을 위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하루,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내가 무엇을 성취하는 수준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영향과 변화를 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생각'은, 내 삶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데 놀랄만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행위가 사실은 우리의 삶에 의미가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남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닐까?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다시 한번 분명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람들에게 충족되어야 할 기본적인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의식주, 그리고 내가 노력을 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전제되고, 그 정도의 환경에 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남을 좀 도와라'라고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더 가진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환경에 최대한 가까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러한 기본적인 생활의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는 사실 우리네 삶에서 행복은 사실 관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은 관계에서 의미가 있어진다.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인생은 왜 그런지는 알지도 못한 상태로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는 한 마리 괴몰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우리는 사회에서 많이 보지 않는가? 이미 죽을 때까지 아무리 열심히 써도 다 쓰지 못할 재산을 가지고도 더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삶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그런 괴물이 된 이면에도 사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남겨주고 세상을 떠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본인의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사는데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혈육만을 위해 사는 삶은 결국 자신의 혈육에게 화살이 되어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더 많이, 더 높게만 추구하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이룬 업적은 어느 순간엔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기에. 그리고 사람은 높은 곳에서 추락할수록 그 삶이 더 비참해지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본인의 혈육을 위한 삶인지에 대해서는 한번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