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왜 경쟁적인가
사회는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다.
민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뤄서 살아가는 사회는 집단 안팎의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의 원인을 도출할 수 있게 해주며, 그러한 원인들을 알아야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만들 수가 있기에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식 경쟁주의의 문제점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한국에서의 경쟁이 문제가 있는 지를 살펴봐야 한다. 한국에서의 경쟁이 좋은 것이라면 그 원인을 깊게 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한국식 경쟁의 가장 큰 특징은 '성공'에 대한 정답이 제시되어 있고, 그러한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학습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등수로 줄이 세워지고, 잘하는 사람들은 칭찬을 받고 못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는데, 사실 이런 경쟁은 아이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획일적이라는 점에서 잘못된 교육방식이다. 어떤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지와 같은 객관적인 사실이 세상에 많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육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객관식 시험을 보면서 무의식 중에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경쟁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는데, 그러한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아이들의 '사고하는 능력'이 개발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주어진 사실을 달달달 외우기만 하니 어떻게 사고하는 능력이 개발되겠는가? 이는 마치 요리를 할 때 재료는 하나 가득 던져주면서 요리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아이들을 이렇게 교육하면서 창의적인 인재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닐런지...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획일화된 기준으로 세워진 줄에서 앞에 서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암기한 것들을 현실에 적용하고 분석하면서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은 개발되지 않는다. 그 결과 아이들은 함께 어울리는 방법보다는 상대를 줄에서 뒤로 밀어내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보다 뒤에 있는 아이들을 하찮게 여기게 되면서도 주어진 틀 밖에서는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창의교육, 창의교육을 외치는데도 창의성이 개발되지 않는 것은 창의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도 줄을 세우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갤럭시폰은 만들 수 있지만 아이폰은 만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와 6.25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이뤄지는 것은 그것을 학부모들이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 입장에서도 학부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등수를 매겨야만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된 것은 단순히 교육, 학교나 선생님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 전반적인 경향성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수요자가 그것을 원하는데 공급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 것을 공급하겠나?
그렇다면 우리나라 교육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렇게 줄 세우는 문화가, 남을 짓밟고 일어나야 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고착된 것은 일제강점기와 6.25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시기는 그야말로 생존만이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 시기에 일본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 한반도에 수없이 사회, 문화적 제초제를 뿌렸는데 그 시기에 한반도에서 과연 생존 이외의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당장 내 옆집에서 아이들이 끌려가고, 트집이 잡히면 내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깨어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독립'에 대한 것이었을 텐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과 생존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이를 입 밖에 내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해방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진다. 나도 전쟁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사진과 영상만 봐도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보다도 더 '생존'이 화두였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은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음의 그림자가 내게도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사람들은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버텨내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겠나?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아있었다면 과연 달랐을 수 있었을까? 쉽게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한반도는 그렇게, 적자생존의 장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박정희와 경제개발
한반도의 상황이 이렇듯 비참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사실 박정희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당장 오늘, 내일 먹고사는 것이 힘들고 미군에게 초콜릿을 얻어먹으면 감지덕지했던 나라가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상당수가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세상이 거의 하루아침에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를 '선택'하는 사치가 생겨났던 시기가 박정희 시대였을 것인데, 그러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던 분들이 그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이용하여 당시 정부는 또 사람들을 줄 세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정권에 충성하며 줄을 서야 했다. 잘못된 줄에 서 있던 이들은 가차 없이 내쳐지고 목숨도 부지할 수 없게 되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줄에 서게 되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일단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안정적인 줄에 설 수 있는 가장 좋은 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짧게 잡아도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1987년까지는 계속되었다.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세상이 말이다.
그때까지도 우리나라는, 우리 사회는 먹고사는 문제에 많이 종속되어 있었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가장 큰 목표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줄을 잘 서고,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리고 세상은 천천히 변한다.
그러한 시기가 형식적으로 종결된 지 이제 30년이 지났다. 한 세대는커녕 반 세대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가, 정권이 바뀐다고 당장 한 사회의 문화가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쩌면 그러한 경쟁이,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국식 경쟁주의'는 역사가 만든 비극일 뿐 누구의 탓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