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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r 31. 2019

내가 연애에서 '이상'을 말하는 이유

예전에도, 지금도 난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난 학부시절에 스스로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정의했다.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자.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한 것은 어느 순간 내가 굉장히 이상적인 말을 많이 하고 다니고, 이상을 추구하며 살았으며, 그게 달성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계속 바라보는 성향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이상을 욕심냈던 것은 아니다. 이상은 이상일뿐이고, 내 힘으로 이상을 달성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또다른 정의로 합리화했다. '어설픈 완벽주의자'라고 정의하면서 말이다.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변하지 않는다. 학부시절에 난 죽어도 박사 공부는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어쩌면 그때부터 난 성향이 그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얘기를 하고 다니지 않나? 그래서 브런치에서 내 글들도 그런 경향이 있다. 나도 내 글을 다시 읽다 보면 '이렇게만 연애할 수 있으면...'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아마 그래서 그런 댓글이 달렸을 것이다. 도대체 마지막 데이트가 언제였냐는 댓글이 말이다. 너무 이상적이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글이라서. 안다. 알았다. 알고 썼던 글이었다. '데이트의 정석'이라는 글. 그런데 사실 '정석'으로 삶이 살아지는 사람은 없지 않나? 아니 수학의 정석도 몇 번을 풀어도 그 정석을 못 지키는 게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 아닌가? 모든 데이트가 항상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 있다고 쓴 글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특히 가정을 꾸리는 과정에서는 그런 데이트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라고 쓴 글이다.


어떤 분들은 '현실성이 없는 글을 뭐하러 쓰느냐?'라고 물어볼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난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비현실적이어도 가장 이성적인 말을 하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 번씩 사람들이 '그래, 완전히 저렇게는 못 살아도 저렇게 살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게 학자의, 이상주의자들의, 몽상가들의 사회적 가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가장 이상적인 세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모든 것에 타협하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어버린 사회현상들은 굉장히 많다. 단적인 예를 들면 사람들은 '낙태'를 얘기하지만 이젠 사회적으로 낙태 앞에 있는 문제인 '성관계를 가정의 테두리 밖에서 가져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그걸 당연시 여기고 곧바로 낙태의 문제로 뛰어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과정에는 굉장히 폭력적인 논리들이 숨어있다. '남자들은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라든지 '현실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라는 식의 논리들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는 '과거에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극소수이긴 하지만 지금도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찌 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도 이젠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어렵기 때문에.


현실은 현실이고, 현실의 한계를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현실만을 얘기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서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그 인생에는 절대로 반전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항상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까지 이상을 추구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작은 문제들에도 그래야 하냐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첫 번째로 '작은 문제'라는 것이 사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글들은 그런 글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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