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낡은 개념일까?

by Simon de Cyrene
1980년대의 '민족'

통일을, 남북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다. '민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 말이다. 이는 헌법에서 분명하게 민족에 대한 내용이 정해져 있고, 통일에 대한 당위성 혹은 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근거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민족'이라는 개념은 점점 낡은 개념과 같이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되었던 1987년에만 해도 '민족'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개념이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동서독이 같은 민족인지에 대해서 동서독 정부가 의견을 달리하긴 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혈통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념적으로 다른 민족이야'라는 동독의 입장과 '민족은 이념에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야'라는 서독의 입장에는 '혈통'이라는 개념에는 두 정부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은 두 정부가 정말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기반시설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 우위에 있었던 서독은 통일국가에서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통일이 되는 것을 원했던 반면, 모든 면에서 열위에 있었던 동독은 그게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었다. 즉,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민족'이라는 개념에 시비를 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세계화와 민족주의

그러한 흐름은 언젠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변화가 '세계화'가 강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하나의 지구에 대한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인 '민족'이란 개념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흑인 선수를 귀화시켜서 축구대표팀에 받아들였을 때, 그리고 소수인종인 사람들이 권력을 갖게 될 때마다 사람들은 '민족'이란 개념이 갖는 폐쇄성을 비판했다.


그에 맞서서 나왔던 개념들이 '열린 민족주의'와 같은 개념들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인정하되 다른 민족, 그리고 다른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민족주의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굳이 세계화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실 난 혈통적인 측면에서의 '민족'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의구심이 많은 사람이다. 굳이 최근에 나온 자신의 혈통에 어떠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검사를 하지 않더라도 뭔가 혈통적으로 순수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나? 지구의 역사를 놓고 봤을 때, 빙하기에, 그리고 지구의 환경변화로 인해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이동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어 있고 심지어 한국 사람, 인디언과 남미 원주민의 문화에도 유사성이 발견되는 상황에서 혈통적으로 '민족'을 인정하기는 사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만약 본인이 기독교인이라면, 더군다나 혈통적으로 민족이라는 것은 기독교와 양립할 수가 없는 개념 아닌가?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니 말이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 만약 인간이 모두 원숭이에서부터 진화했다면 어떤 민족은 어떤 원숭이에서부터 진화하고 다른 민족에게서 진화했단 말인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입장들 어느 것을 따르더라도 혈통적으로 '민족'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분명하다.


민족, 부인해야 하는 개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한번 물어봐야 한다. 우리는 '민족' 혹은 'ethnicity'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야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민족'은 한자어로 풀어보면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ethnicity는 nation을 의미하는 ethnos라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갖는데 ethnikos라는 그리스어는 더 구체적으로 '이도교들'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nation'이란 용어는 민족으로 번역이 되기도 하지만 국가라고 번역되기도 한단 점을 고려한다면 ethnicity는 결국 특정하게 구분되는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ethnikos는 자신들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교도들을 의미했고 말이다.


'집단'이라는 것은 또 다른 말을 사용하면 '사회'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즈음에 물어보자.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이냐고 생각했다면,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에 섰던 대처 총리가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대처 총리의 그 발언은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이는 사실 '사회'를 부인한다면 '국가'도 존재할 수가 없는데 본인은 그 국가의 총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집단은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것은 그 사회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동질성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그건 '민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집단, 민족, 국가를 구분해서 생각하지만 근대국가가 생기기 전에 집단들 간의 질서를 생각해 보면 집단, 민족, 국가는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 비춰봤을 때 혈연중심이 아니더라도 사회 구성원들 간에만 공유하는 가치나 삶의 방식이 있다면 그 집단을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까지 부인할 이유는 없다. 사실 그것까지 인위적이라고 한다면 세상에는 그 실체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따지면 시간도, 나이도 모두 관념에 불과하고 돈은 종이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고 '국가'라는 것, '국적'이라는 것도 엄연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인간의 삶 속에는 그 실체가 있어서 무엇인가가 '그러한 경우'보다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한민족'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한반도에 '한민족'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민족이라는 집단이 중심이 되어서 현재 한반도 위에 조선과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남북한 주민들은 엄연히 다른 존재라고 할지도 모르고, 실제로 남북한 주민은 많은 면에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동독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북한 주민들은 '사회주의적 한민족'이고 남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한민족'이라고 구분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선 남북한 주민들은 역사에 대해서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남북한에서 가르치는 역사의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교과서 편재를 보면 기본적인 인식의 틀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남북한 사람은 구체적인 용어에는 차이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음식도 비슷한 것을 많이 먹는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북한 주민을 모두 만나본 외국인들이 하나 같이 '남북한 주민은 비슷한 점이 정말 많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남북한 주민들은 한반도 위에서 살아온 조상을 두고 사회적으로 비슷한 특징을 갖게 된 존재라는 측면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서 '민족'이라는 그 구체적인 요소들은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또 너무 혈통중심으로 민족을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열린 민족주의'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실 민족주의라는 것이 폐쇄적이고 닫혀 있을 필요는 없는데 '열린 민족주의'라는 표현은 민족주의를 폐쇄적인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실 문화는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에 따라서 변하게 되어 있고, 그렇다면 어쩌면 민족문화, 민족성이라는 것을 고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민족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임을 감안한다면, 사실은 민족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그 개념 안에서 유연한 해석이 이뤄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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