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없어도 괜찮아요

by Simon de Cyrene

친구가 '남의 집 프로젝트'를 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친구가 진행하는 것과 유사한 사업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친구가 남의 집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봤던 사업들 중에서는 트레바리 정도 외에는 알지 못하게 되었을 회사들이, 사업들이 꽤나 많다. 몰랐다. 이렇게 '취향'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을 줄은.


사실 트레바리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내 친구가 사용한 '취향'이라는 표현을 트레바리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독서도 취향이 될 수 있는 걸까? 독서를 취향으로 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트레바리는 유행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취향이라는 표현을 마케팅의 방법으로 사용한 것일까? 독서에 '취향'이란 단어를 붙인 것은, 개인적으로 독서는 진지하게 하는 편인 내게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독서가 너무 가벼워진 느낌이어서.


취향이 넘치는 시대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하자면 '취향을 강요받는' 듯한 시대인 느낌도 없지 않다. 52시간 근무제 도입, 퇴근 후 취미 생활하는 사람들, 나를 노출시키는 것을 적극적으로 하도록 설득하는 기사와 미디어들, 그리고 실제로 인스타와 유튜브로 향하는 수많은 발걸음들. 회사일 말고도 뭔가 그럴듯한 취미를 가져야 할 듯하고, 직장만 다니면 안 될 듯한 분위기가 없지 않다.


고백건대 난 취향이 그렇게 명확한 사람은 아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내 취향은 명확하지만 그걸 취향이라고 특별하게 분류한 적도 없고, 남에게 굳이 그걸 드러낸 적도 없다. 그런 취향은 나만의 것이고, 나 혼자 누리면 되기 때문에 굳이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그걸 공유하고 싶지도 않다. 굳이 남에게 드러내는 나의 취향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이 공간이 아닐까?


취향, 갖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취향이 없는 것도 그 사람의 취향이다. 취향이란 것이 뭔가 꼭 반짝여야 하고, 다른 사람과 반드시 공유하고, 그것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취향'으로 표현되는 것들 중에는 사실은 그 사람의 취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취향이고 싶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인지해줬으면 하는 욕구에서 표현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그러하는 것은 본인만 느끼지 못할 뿐 주위 사람들은 그걸 다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보이는 것이 너무, 과도하게 중요시된 사회를 산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인스타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유튜브로, 그리고 유튜브에서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졌다가 그 오프라인은 다시 온라인으로 연결고리를 찾아서 자기 과시와 자기 과잉의 순환고리가 발생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나쁠 것도 없고, 자신의 취향을 즐기는 것이 나쁠 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그 안에 '남들이 나를 000 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 그건 본인에게도 좋을 것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공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취향이 자신을 어떠한 방향으로든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 취향은 포장지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아주 가끔이라고 하기엔 자주, 자주라고 하기엔 가끔씩 '우리는 취향의 과잉을 경험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얇고 넓은 취향의 시대.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꽤나 괜찮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는 시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꽤나 큰 비용을 기꺼이 지출하는 시대. 내게 '취향'이란 내가 좋아하는 깊은 무엇을 의미하기에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회자되는 그러한 취향은 내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진다. 그 안에서 나는 꽤나 자주, 나의 내면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자신은 내면을 채우는데 관심 있는 사람임을 밖으로 보이고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하는데, 몇 년이 지나도 그 사람의 내면이 채워지는 느낌은 없는 것은 왜일까?


모든 사람들이 반짝일 필요는 없다. 반짝이지 않아도 된다. 아니 반짝일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 평범한 일상을 고단하게 버티면서 살아내며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사실 진짜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보이지 않게 본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고 사랑하는 삶 속에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반짝거리는 취향이라는 포장지로 인해 눈이 부셔서 그렇게 평범하지만 아름답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은 잘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트레바리 초기에 그 안에서 깊은 대화와 나눔이 좋아서 그 비용을 내고도 참여했는데, 갈수록 그 모임이 얕아지고 사변적이 되어가서, 그게 싫어서 이젠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한다. 그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사업을 키우려고 하다 보면 질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더라. 풀을 넓혀야 하니까.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업화된 자본주의적 취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람들이 얇고 넓은 취향을 향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는 무엇인가를 깊게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과정에는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일정 수준까지는 호르몬 작용으로 인해 새로운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즐거움이 있지만 그 이상 더 깊게 들어가면 힘듬이, 고통이 수반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그 과정이 우리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러한 내면의 변화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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