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대한 철학이 없으니 방황은 여전할 뿐
나는 서른 살에 결혼했다. 28살부터 직장생활은 시작했으나, 돈은 모으지 않았다. 받는 즉시 모든 돈을 탕진했다. 차도 샀고, 열심히 놀러 다녔고, 갖고 싶은 게 생기면 하나씩 사모았다. 재테크는 인생을 갑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이라 치부했다. 나는 자유로웠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산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척 행복한 소비생활이었지만, 내 생에 아주 큰 고비가 찾아왔다. 당시 여자친구가 덜컥 임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예상보다 결혼을 빨리 당겨서 할 수밖에 없었고, 준비를 위해 각자 가지고 있는 돈을 모아봤으나, 이럴 수가. 우리는 돈이 없었다. 연인이라는 것이 당연히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었을테니, 내가 마구 돈을 써대는 만큼 그녀도 돈을 써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인생의 문제, 즉 혼전임신으로 인한 결혼과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돈이 없다는 사실은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부모님이 넉넉한 형편이라면 염치 불구하고 손이라도 벌리겠다만, 내 직장에 빌어 신용대출을 받아 아버지의 빚의 일부분을 탕감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돈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뭐, 여자친구 쪽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았다. 결혼을 준비하던 언저리에, 나는 처음으로 가슴에 저리는 후회를 했다. 그때, 아주 적은 돈이라도, 조금 모아둘 걸, 하는 아주 원초적인 후회 말이다. 물론 내 한 몸 간수하는 데는 큰 돈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나와 내 아내, 그리고 내 아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계비는 분명 3인분의 돈이 필요했다. 물론 내가 직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수입도 또래들에 비해 적게 받는 편도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닥친 '혼전임신'은 '돈'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비교집단을 허구의 타자-돈이 아주 많고, 서울의 신축 아파트에 살며, 하루 종일 아무 걱정 없이 여가시간만 보내는 사람-으로 상정을 해버리고, 내가 그들보다 '없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질문, "나는 그들보다 얼마나 부족한가?"만 반복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그 결과 '아무리 벌어봐도 좋은 출신성분을 가진 자를 따라갈 수 없다'거나, '내가 태어난 집은 전형적인 흙수저 집이었다'는 둥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드는 생각만 하루에 몇 번씩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옳지 않은 태도였다. 마음이 넉넉해지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아주 궁상맞은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마저 느꼈다. 제대로 된 질문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실 인간에게 몇 십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결과물일 뿐이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자본을 위해 일하는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과 적절한 성취감을 주는 노동, 그리고 이러한 생활이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정감이지 않을까. 약간의 사치를 부릴 잉여금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없다고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돈이 없다'는 상대적 관념 때문에 인간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거나, 실제로 죽는다. 돈에 관해 취할 수 있는 현명한 방식이라면, 삶에 필요한 '최소비용'을 계산하고, 그 이상을 손에 쥐고 있다면 재정적 공포에 떨지 않는 것이다. 우리 가족(현재 2인 가족) 최소비용을 계산해본 결과, 130만원이면 충분히 넉넉하게 생활이 가능했으니, 나는 이미 충분하게 돈을 가지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 굳이 '돈이 없다'며 징징거리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남들은 얼마를 저축하는데, 남들은 어떤 재테크를 하는데, 남들은 어디에 투자를 했다는데, 하는 것들은 비교대상이 아니라 참고사항 정도로 여기는 게 좋지 않을까. 돈이 없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은,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어떤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 가장 만족스러우며, 어떻게 돈을 썼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남들이' 하는대로 돈을 벌고, '남들이' 좋다는대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