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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메디오스 Sep 27. 2021

들어가며

내 몸에 대한 도발적이고 발칙한 이야기들

거울을 본다.  

    

내 키보다도 큰 전신거울 속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아침마다 20~30분 가까이 솔빗으로 빗어대고 왁스와 머릿기름을 발라대도, 타고난 반곱슬 머리카락들은 민들레홀씨마냥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오른다. 어깨는 80대 노인인양 구부정하다. 20대 초반부터 척추측만증 판정을 받은 허리가 평균보다 넓은 어깨를 지탱하기 힘든 탓이다. 이제라도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고군분투 중이건만 긴장을 놓으면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지고 만다. 눈언저리에는 미처 씻어내지 못한 아이섀도의 흔적들이 보인다.      


거울은 영혼을 비추는 도구라고 했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신비로운 것으로 다루어 왔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괴담들, 학창시절 내 밤을 지새우게 했던 판타지 소설들에서 흔히 ‘다른 세계와 통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해 온 것도 바로 거울이었다. ‘거울을 보며 가위바위보를 했다. 내가 이겼다’라느니, 2개의 거울을 마주보게 하면 무수히 많은 상이 비치는데 그 중 13번째가 귀신이라느니, 이런 섬뜩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거울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닌, 이면(裏面)을 엿보기 위한 것이라고.       


그래서일까.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낯선 생명체와 조우하듯 두렵다. 또한, 수치스럽다. 내 얼굴과 시선을 빌린 다른 존재가 나를 샅샅이 훑어보는 것만 같은 느낌. 저 너머에서 뻗어 나온 두 손이 내 얼굴을 움켜쥐고 어둡고 축축한 세계로 끌어당길 것만 같은 초조함, 그리고 이질감.      


그러나 나는 거울의 신비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울을 통해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기에 앞서, 이 판단은 타자(他者)의 관점에서 지극히도 객관적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특별할 게 없는 몸이다. 170cm 정도의 키에 유독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통짜' 허리. 양쪽 눈 모두 10디옵터에 이르는 초고도 근시지만 얼굴의 형태와 눈 크기를 왜곡하는 안경이 싫어 십 수 년째 콘택트렌즈를 낀다. 다리를 꼬는 버릇 탓인지 골반 아래 무릎까지 미세하게 비틀려 있다. 허리가 굽은 지 오래이니 키가 조금은 줄었을지도 모른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숯덩이처럼 진하지만, 길이가 짧아 일본 전통 화장법인 히키마유를 떠올리는 눈썹이 있다. 쌍꺼풀이 유난히도 진해 어린 시절 중동 혼혈이라는 오해를 종종 받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선지 이제는 이국의 흔적 따위 보이지 않는다. 코는 높지만 아쉽게도 부리코다. 내 아이에게 읽어주는 동화 삽화 속 마녀들과도 퍽 닮았다. 입술은 얇고 유난히도 색소가 옅어 햇살이 강한 날엔 입 주위 피부와 경계가 사라지고 만다. 피부는 전체적으로 하얀 가운데, 광대뼈와 눈썹 아래가 유난히도 노랗다. 아직까지도 군데군데 뾰루지가 보인다. 세수하다 긁어낸 상처들도 있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가.      


조지 오웰은 그의 저서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했다. 다른 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오래 기억되고자 하는 ‘순전한 이기심’,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기 위한 ‘미학적 열정’, 사물을 있는 그대로 후세에 전하려는 ‘역사적 충동’, 타인들의 생각을 계몽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몸에 대해 쓰고자 하는 충동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가.      


나는 그저 써 내려가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평균 수명이 83.8세라는 기사를 본 후, 나는 내가 ‘평균적으로’ 주어지는 삶 중 절반 가까이를 살아냈음을 실감했다. 30대 후반을 지나는, 이제 곧 중년에 가까워질 나이. 이에 나는 지나온 삶을 생각했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매개로 내 삶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또한 영혼을 닮은 조형물이다. 젊은 시절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나 나이 들어서의 얼굴은 삶의 반영이라고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행동이라는 물감과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삶의 풍경화이다. 궤적이다.     


또한 개인의 몸에는 한 세계가 담겨 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구로 만들고, 정신과 신체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긴다. 지독히도 가난하고 치열했던 산업사회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이들은 재봉틀 바늘에 손톱이 으깨어지고, 코와 목을 관통하는 매연에 기관지부터 썩어 들어갔다. 성적과 서열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현대인들은 종일 책상에 앉아 몸을 비틀어대는 통에 목과 허리가 굽고 뼈에는 구멍이 뚫린다. 미세먼지에 맞서 속눈썹은 길어지고, 피부에는 한 겹 두 겹 새로운 살이 덮인다. 몸은 사회이며, 시대의 증명이다.    

  

그래서 나는 몸을 생각했다.      


눈, 코, 입, 입술, 이, 다리…. 메스를 들어 살갗을 들어내듯 나는 내 몸을 하나하나 파헤쳐보고자 한다. 내 삶의 어떤 시간들이 내 몸을 덧그렸는지, 그 흔적들을 샅샅이 찾아낼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를, 사회의 흔적을 더듬으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한 사회의 증명으로 남아질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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