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읽었던 '디 그레이 맨'이라는 만화에선 적 종족인 악마들에게 레벨 1부터 레벨 5까지의 성장에 따른 위계가 존재했다. 나는 당시 성장의 차이를 레벨이라는 경직된 용어로 도식화한 것이 이해되지 않고 다소 촌스러워보였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어느 영상의 내용은 나를 매혹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주인공의 친구 '그웬'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마일즈만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다'라는 대사를 통해 자신이 주인공 마일즈의 복제라고 시인한다. 그러나 그웬은 마일즈와 다른 독자적인 가치를 가진 존재이고 결말에 이르러선 옴짝달싹 못하게 된 마일즈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에 이른다. 그웬은 마일즈의 복제이되 원본을 덮어버릴 수도 있는 복제품인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그리고 허무주의적 재앙인 '스팟'을 통해 형성된 이 스파이더맨들의 시뮬라크르적 관계는 캐논(기정사실)이라는 하이퍼리얼리티(현실을 대체한 가상)에 잠식되어 이를 강요하는 수직적 악역'미겔'에 저항할 단초가 된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수평적 복제 혹은 학습을 주동인물에, 수직적 복제를 반동인물에 대입하는 창작의 공식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창작물에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정점에 있었던 '어벤져스' 시리즈의 경우도 그렇다. 어벤저스의 멤버 6명은 수평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특기와 역할을 갖고 서로를 보조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지휘를 담당하지만, 다른 멤버에게 고압적으로 굴지 않으며 그의 권위는 그의 현명함에 대한 다른 멤버들의 존중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다. 다른 멤버가 들어와도 마찬가지이다. 워 머신이 앤트맨에게 장난을 치고, 헐크가 이를 위로한다. 어벤져스는 철저한 수평적 관계이다.
그러나 이를 공격하는 타노스의 군단은 완전히 수직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타노스의 밑에 블랙 오더가 있고 그 밑에 아웃라이더와 치타우리 군단이 있다. 이 공동체에서 타노스에 대한 항명은 있을 수 없으며 개인은 자신보다 높은 위계의 마이너 카피이자 같은 위계의 완전한 카피이다. 전쟁의 끝에서, 아이언맨인 토니는 캡틴인 스티브의 희생정신을, 스티브는 토니의 이기심을 배워 서로의 결말을 찾아간다. 마치 헤겔의 인정투쟁에서 인용되는 다 빈치가 그림 속 남자에서 자신을 찾듯 서로의 모습을 학습한다.
이러한 기류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대중문화의 폭발이라고 기억되는 80년대 역시 60년대에 록 음악이 발생한 이래 있어온 반항적인 문화를 이어받아 이러한 기조를 보이고 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인 해리슨 포드가 맡은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한 솔로는 수직적인 제국군에 맞서기 위해 루크, 레아와 더불어 수평적 관계를 형성한다. 인디아나 존스 역시 어린이들을 노예로 삼는 수직적인 써기스에 맞서 싸운다.
이러한 20세기와 21세기를 아울러 대중문화에서 드러나는 수평적 관계에 대한 갈망은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증기기관의 발명에서 비롯된 산업혁명과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자들의 착취, 이러한 자본주의의 심화에서 비롯된 전통적 가치의 붕괴는 19세기부터 허무주의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전체주의자)들은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며 극우적인 사상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다. 파시스트들이 몰락한 후에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에 의한 냉전으로 시민들에 대한 압제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통신이 발전하고 교육율이 높아지면서 록음악을 중심으로 뭉친 신세대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강요가 이제 지긋지긋했다.
즉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픽션이 복제에 가까운 수직적 관계에 대한 부정을 밑바탕으로 깔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상흔들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의 그것과 21세기의 그것엔 큰 온도차가 있다. 21세기는 극단적 허무주의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60~90년대의 저항정신과 개인주의는 이데아라는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항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저항이었다. 히피들의 공동체도 그런 맥락에서 기존 사회를 거부하고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그런 적극적인 저항을 보기 힘들다. 원자의 움직임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식의 과학이론들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보편적이고 극단적으로 치닫게 했고 점점 커지는 사회와 그것을 체감케 하는 인터넷의 발달은 객관적으로든 스스로에의 인식에 있어서든 개인의 가치를 무에 수렴하게 만들었다. 현재의 10~20대들은 부조리를 버티기 위해 빠르고 쉽게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1분 남짓의 영상들을 이용할 뿐이다. 이러한 산만한 구성의 미디어는 사람을 자기파괴적 ADHD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 불변의 가치를 창출하는 원동력인 고독이나 성찰의 과정은 긴 시간과 집중을 요구하기에 기피되고 사라져 간다.
"어떻게 물리칠 계획이었어?" "함께." "우린 질 거야." "그럼 그것도 함께 하는 거지."
언젠가부터 일본 소년만화계를 대표하는 잡지인 '소년 점프'의 홍보물 속에서 만화 '블리치'의 자리를 '드래곤 볼'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 '기생수' 등의 90년대 만화들이 재조명되는 복고적 흐름과 연관된 것일 수도 있지만 살아남은 간판만화인 '원피스', '나루토', '드래곤 볼'과 '블리치'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서이다. 블리치에서 주인공 '이치고'는 작품 내 종족인 사신, 퀸시, 풀브링어, 호로의 힘을 모두 사용한다. 아버지가 사신이기에 사신의 힘을, 어머니가 퀸시이기에 퀸시의 힘을, 호로에게 공격당하며 호로의 힘을, 그리고 힘을 전부 잃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풀브링의 힘까지 손에 넣는다. 퀸시일 뿐인 '우류'나 풀브링어인 친구들이 없어도 블리치 속 세계는 이치고가 구원할 수 있다. 이러한 근접하기 힘든 궁극적인 초인의 존재는 어벤져스 같은 공동체와 달리 '원맨쇼'의 분위기를 풍기며 독자들에게 질림과 절망감을 줄 수 있다.
나루토에서 주인공 3인방과 카카시는 티격태격하더라도 한 명이라도 이탈하면 외계세력을 막을 수 없다. 원피스의 주역인 밀집모자 해적단에서 가장 약해보이는 나미나 우솝은 독자적인 지성이나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성격으로 공동체의 필수적인 존재를 맡고 있다. 드래곤 볼에서 주인공 측의 양강인 손오공과 베지터는 사실 부인에게 잡혀 사는 남성들이다. 평범한 인간인 미스터 사탄의 선의가 없었다면 손오공의 '힘'만으론 우주적 악의 근원인 마인 부우는 물리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정서와 메시지는 명료하다. '너도 우리의 일원이다. 공동체의 하나로서 너 역시 활약하고 있다. 너는 사회에 필요한 존재이다.' 어벤저스나 일본의 소년만화 등 현대의 대중적인 픽션들이 지향하는 수평적인 시뮬라크르의 가치관은 극단으로 치닫는 21세기의 허무주적 파괴 속에서 개인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공동체와 개인의 가치가 공존하는 것이 이율배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가시돋친 고슴도치가 되는 것이 아닌 타인에 대한 신뢰와 선의, 양보, 배려가 곧 세상과 개인을 치유하리란 올곧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인류가 겪어온 일들에서 비롯된 그 많은 생각과 마음들이 오늘도 우리가 접하는 지면과 스크린, 액정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를 자극적이고 나쁜 것으로 치부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