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을 감시하는 요원들은 양복을 갖춰입고 있다. 반면 요원과 요원들의 모체인 기계들에 저항하는 인간 저항군은 가죽자켓이나 코트를 입는다. 얼핏 생각하기엔 그저 멋있어서 택한 코디네이션 같지만 곰곰히 비교해보면 기성세대와 록큰롤 세대를 레퍼런스한 듯한 패션을 통해 두 진영의 대립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양복 차림의 백인 중년 스미스가 차렷자세로 열을 지어있는 최종장 속 장면은 전체주의를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스미스는 만물이 무가치하다고 믿는 '허무주의'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사복차림의 네오가 홀로 그 무리를 뚫고 걸어나가는 장면은 '저항' 혹은 '구세주'라는 테마를 표현하기에 훌륭한 미장센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네오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해당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OST 'Navras'는 힌두어로 아홉이라는 뜻의 Nava 와 감정이라는 뜻의 Rasa 를 합친 조어라고 한다. 힌두교 세계관에 존재하는 아홉 감정 중 마지막 아홉번째 감정은 '평온'이라고 한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묻는 기계의 지도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네오는 이렇게 답한다. 'Piece(평온).' 이 대사는 얼핏 뜬금없는 말처럼 느껴지거나 기계와 인간의 화합을 뜻하는 말로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스미스라는 거대한 파괴적 허무주의를 물리치길 원한단 뜻이다. 2편 '리로디드'에서 네오가 잠시 보호한 부부는 프로그램이지만 사랑의 힘으로 딸을 만들어냈다. 이 부부로부터 영감을 얻은 네오는 영화의 끝에서 트리니티에 대한 사랑을 좇아 모든 것을 거슬러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부부는 억양이나 부인의 패션으로 보아 인도계로 추측된다. 앞서 말한 힌두교의 아홉감정들 중 첫번째 감정은 '사랑'이다. 즉 인도계 부부의 등장 자체가 이 영화가 하나의 힌두교적 은유이며 네오가 사랑을 좇아 평온을 추구할 것이란 복선이었던 것이다.
허무주의를 반동인물로 내세운 영화라 하면 난 역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떠오른다. 영화 속 빌런인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보았기에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허무주의적 초인이다. 이에 맞서는 어머니 에블린은 모든 것을 봄으로써 딸을 이해하게 됐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선물로 여길 수 있게 된 히어로이다. 에블린은 어떻게 딸과 반대의 길을 걷게 됐을까? 영화 속에서 에블린은 수많은 멀티버스 속 남편 웨이먼드를 보고 이를 깨닫게 된다. '온화하게 사는 날 바보로 여기겠지만, 이는 사실 전략적 선택이다'란 웨이먼드의 말을 듣고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온화함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에블린은 혼자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 네오가 트리니티에 대한 감정을 좇았듯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가 '당신처럼 싸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라며 구글아이를 이마에 붙이는 장면은 에블린이 의미없는 세탁물에 구글아이를 붙이며 가치를 부여하는 웨이먼드처럼 만물에 감사하는 존재가 됐음을 말한다.
'에에올'의 감독인 다니엘스는 Vimeo나 유튜브 등지에 쇼츠 형식의 영상을 업로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자극적이고 산만한 콘텐츠들이 미국 대안우파의 상징이 돼버린 '페페 더 프로그'와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단 성찰을 한 이후로 자신들의 영상에 의미를 담으며 영화감독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영화의 빌런인 '조부 투파키'가 인터넷에 익숙한 Z세대에 해당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다니엘스에게 있어 Z세대는 부조리한 삶과 자극적이고 산만한 콘텐츠에 노출되며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을 닮은 파괴적 허무주의-혐오를 위한 혐오와 다툼 같은 것에 빠질지 모르는 세대였던 것이다. 그런 한편 다른 세계의 에블린이 20세기 미국을 닮은 맥시멀리스트로서 딸을 '조부 투파키'로 만들었단 설정은 근현대사 혹은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 내지 자성을 담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은 모두 감정의 힘을 통해 허무주의라는 거대한 파괴를 극복해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냈으며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단 사실도 닮아있다. '에에올'은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트릭스'는 초인적인 투쟁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영화의 관점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메시지는 모두 같다. '평온(Piece)'에 대한 기원이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 3부작에 대해 '1편만 재밌다,' '1편만 봐도 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매트릭스 3부작은 에필로그를 제외한 세 작품(매트릭스, 매트릭스 2: 리로디드, 매트릭스 3: 레볼루션)을 모두 감상해야 진정한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시리즈이다. 시리즈의 구조 역시 시리즈 전체가 문학의 구조와 맞닿게 설계되어 있다. 주인공이 모험을 시작해서 자유의지를 쟁취하는 1편은 발단과 전개, 아키텍트가 폭로하는 진실에 의해 이것이 무너지는 2편이 위기, 스미스를 물리치고 '평온'을 이뤄 세상을 구원하는 3편이 절정과 결말에 해당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구세주 서사를 느껴보기 위해 매트릭스 3부작을 온전히 관람해보길 항상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