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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지어스 Nov 11. 2023

드라마 '로키' (시즌1, 2) 감상평

영광스런 목적 - 언제나 영원히, 변함없이.

※ 드라마 로키 시즌 2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디즈니+ 드라마 '로키'의 시즌 2가 어제 완결되었다. 시즌 1의 경우 북유럽 신화의 신을 마블이라는 형형색색의 세계관에서 끌어와 SF를 찍는단 기획이 생소했음에도 불구, 감정을 깊게 터치하는 장면들과 로키란 캐릭터에 대한 높은 이해,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결말을 통해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시즌 2의 경우 4화까진 이전 시즌보다 미흡한 느낌이었드나 5화에서의 반전과 마지막 화에서의 울림으로 인해 내 마음 속에서 멀티버스 사가 최고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은 나의 작은 이론을 통해 마블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며 로키란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글로 풀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계속하는 두 주인공


 영화에는 지켜야 할 일정 농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물이라고 치면 빨간색 물감을 섞으면 그만큼 보색인 초록색 물감도 넣어야 한다. 파란색 물감을 넣으면 마찬가지로 보색인 주황색을 넣어야 하고, 그 미세한 차이에서 영화의 특색이 결정되지만 특정한 색만 튀는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다.


 이를 테면 주인공과 반동인물의 양상이 그렇다. '그린 북'이란 영화에서 두 주인공 중 하나인 돈 셜리는 흑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구태여 위험한 남부로 음악 투어를 떠난다. 나머지 한 주인공인 토니는 셜리를 호위하고 보수를 받기 위해 그의 기사로서 동행한다. 두 사람은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은 여행이란 형식으로 표현되며 그 과정에서의 화합반응이 관객들에게 감정을 전달한다. 그런 그들의 성취를 위한 여정을 +(플러스)라고 하면, 그들을 막아서는 백인 양아치들과 경찰, 차별주의자들은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다. 그 +와 -의 요소가 농도를 맞추되 +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영화의 긍정적인 톤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를 '+와 - 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리는 두 진영


 '그린 북'에선 주인공들이 +, 반동인물들이 -였다. 많은 영화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슈퍼히어로 장르에선 그 양상이 반대로 나타난다. 악당 측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슈퍼히어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즉 슈퍼히어로 장르에선 주인공이 히어로가 -, 빌런이 +인 것이다.


 MCU를 생각할 때 내가 자주 떠올리는 모티브가 있다. 아이언맨은 만들어서 성취하는 인물, 캡틴 아메리카는 부숴서 성취하는 인물이란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항상 악당들이 꾸민 음모를 파괴하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한다. 하이드라의 비행정인 발키리와 헬리캐리어를 파괴하고, 실드를 소멸시키며, 타노스의 군대를 격파한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을 가로막는다면, 아이언맨의 아크 리액터도 파괴해버린다. 캡틴은 대표적인 -형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파괴는 상식적으론 용납되지 않는 것이기에 마블 스튜디오는 캡틴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을 촘촘히 배치해 이를 정당화시킨다. 캡틴에겐 몇 가지 올바른 신념들 -무고한 이를 억압해서는 안된다, 생명을 거래하지 않는다 등- 이 있고 이는 일상에 있어서든 싸움에 있어서든 캡틴 자신을 희생하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막거나, 자신의 시대를 상실하거나 (Man Out of Time), 어벤저스로서의 명성을 내려놓는 등의 행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치밀한 이야기 구성으로 인해 우리는 캡틴의 파괴행위에 불편함을 느끼긴 커녕 고결하고 정의로운 결단으로 느낄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는 아주 잘 만들어진 '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행하는' 주인공 유형이다.


영웅주의는 위험한 만큼 깊은 의미가 담겨야 한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한 인터뷰에서 '아이언맨은 마지막 임무 때 죽을 각오나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발언을 해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아이언맨의 팬들은 그들의 영웅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담았길 기원한 것이다. 몇 년 전 개봉한 '토르: 러브 앤 썬더'가 혹평을 받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작중 내내 토르는 '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영웅적 행위를 한다. 어린이들을 구출해야 하고, 빌런 고르의 악독한 소원을 저지해야 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토르는 같은 유형의 영웅인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거기에 어떤 고상한 주관이나 철학, 깊은 신념을 담지 않는다. 토르가 행해야만 하는 일을 행하며 보여주는 모습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는 등 바보같고 유치한 행동들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바보 아저씨처럼 그려진 토르보단 드라마를 통해 각성한 로키가 더욱 고결해보일 정도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지워버리듯 망가졌던 시계를 수리하는 닥터 스트레인지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독특한 캐릭터로 '닥터 스트레인지'를 꼽고 싶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끊임없이 '비워냄'으로써 무언가를 성취하는 인물이다. 떨리는 손을 고치길 포기하고, 도르마무의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스칼렛 위치를 물리칠 칼자루는 아메리카 차베즈에게 넘겨주고, 이루지 못할 사랑인 크리스틴도 보내준다.


  그러나 닥터는 자신의 안에서 무언갈 비워낼 때마다 그에 부합하는 보상을 받는다. 손을 고치지 않은 대신 그는 최고의 마법사가 된다. 자신의 목숨과 삶을 내려놓는 것은 도르마무에게서 승리하는 비결이었다. 칼자루를 넘겨준 아메리카는 실제로 스칼렛 위치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비록 크리스틴과의 사랑은 이루지 못했어도 새로운 사랑인 클레어가 찾아오게 된다. 마치 존재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닥터는 계속해서 비워냄으로써 진정한 삶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이다.


초월적인 능력을 얻었음에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한 로키


 이번 드라마 '로키'의 시즌 2는 마블 스튜디오의 그러한 희생과 비워냄의 미학이 꽃을 피우며 절정을 이룬 듯한 피날레를 보여주었다. 로키가 어떤 인물인지 되돌아보면,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고독한 인물임을 떠올려낼 수 있다. 마치 흑인에게도 백인에게도 소외당하던 그린 북의 셜리처럼 말이다.


 로키는 거인이지만 신들의 왕자로 성장했으며, 왕좌를 갈망했지만 형 때문에 좌절하고, 유일한 이해자인 어머니는 사망하였으며, 지구인에게도 아스가르드인들에게도 심지어 타노스에게도 미움받는 무적자가 되어버린다. 형인 토르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성장을 마친 후 상실을 겪었다면 로키는 타고나길 외톨이이다. 신화 속에서 그렇듯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 사실은 긴 시간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아이러니의 미학을 띠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랬던 로키가 드라마가 진행되며 TVA에서 모비우스를 만나고, 실비를 만나며, B-15와도 동료가 된다. 시즌 2에서도 OB, 케이시, 빅터 타임리 등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무적자였던 로키의 집은 이제 TVA가 됐다. 따라서 실비의 질문에 로키가 솔직하게 답했듯 TVA를, 친구들을 돌려받고 지키기 위해 그가 고군분투한다는 사실은 (배경설정을 잘 아는 팬들에게는 더욱) 큰 당위성을 가진다. 드라마 두 시즌에 걸쳐 펼쳐진 로키의 이야기는 로키가 절망하면 세계가 끝나며, 로키가 자신을 희생하여 세계를 구하는 그야말로 '로키'라는 이야기였다.


소중한 이들과 장소를 지키기 위해 로키는 결단을 내린다.


 타임슬립을 거듭하며 시공을 초월하게 된 로키는 마치 도르마무 앞의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몇번이고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토리와 달리 로키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 결국 실패한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개념에 압도감을 느끼듯이 로키 역시 SF의 주인공이라 해도 이를 거스를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선악과를 내미는 뱀처럼 그를 조롱하고 회유하는 '남아있는 자'에게 단호히 No를 외치고 영웅들과 같은 길을 걷는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으로서 스스로를 내려놓고 멀티버스를 지탱하는 존재가 되길 결심한 것이다. 신화 속 신처럼 천옷과 신발을 걸친 채 무수히 가지친 멀티버스를 지탱하는 존재가 된 그는 더 이상 신이라며 꼬장부리다 헐크에게 얻어맞던 찌질이가 아닌 진정한 신, 시간의 신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아스가르드인 시절 아홉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 그가 위그드라실 형태의 멀티버스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그의 성장과 더불어 '토르', '어벤저스' 속 북유럽 신 로키의 궤적을 짚어온 팬들에게 더 이상 탁월할 수 없는 미장센이었을 것 같다.


 드라마 '로키'는 6화, 시즌 전체로 보면 12화에 걸쳐 로키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 진정한 신이 될 운명을 시간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낸 수작 드라마이다. 특유의 세계관, 미장센, 시간이 주제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들, 이를 통해 주제를 풀어내며 이룬 감정에 대한 터치, 마블 특유의 주제의식까지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의 희망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아직도 난 쓸쓸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키의 마지막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왕좌는 '남아있는 자'의 의자와 달리 황금으로 물들어있다. 그가 다른 이를 희생시키는 대신 스스로를 희생해 멀티버스를 지키에 - '영광스런 목적'을 위한 왕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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