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꿈일기를 다시 읽으며, 조금 넓어진 세계의 표면을 더듬어본다.
2008년은 스무 살이 되었던 해다.
고등학생에서 갓 성인이 된 내 모습을 되새겨본다. 그토록 원하던 스무 살을 얻은 아이는, 생각보다 세상에 던져지기엔 더 어리숙하고 어중간한 상태임을 금방 알아차렸었다. 드라마와 영화, 만화책 속의 스무 살은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조금 확장된 세상의 자유 속으로 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꿈속의 세상도 함께 확장되었을까. 낙원과 외국인, 영화 속 소년 같은 조금 더 바깥 세계의 이미지들, 스쳐가지만 따스한 말을 건네는 꿈속의 인연들처럼 말이다. 여전히 불안과 외로움을 품고 있었지만, 2007년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자아와 타인의 온기를 함께 품기 시작한 해였던 것 같다.
2008.02.07
영화 볼륨을 잔뜩 키우고 잠들었더니, 꿈속에서 외국인만 나왔다.
본의 아니게 핫도그 가게에 나란히 서서 핫도그에 케첩을 뿌렸다.
감정태그 : 자기애, 기쁨
스무 살은 무럭무럭 미뤄두던 영화들을 잔뜩 보기 시작했던 때였나. 2008년 2월 7일의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있었을지 새삼 궁금하다. 대한민국 땅을 처음으로 벗어나 본 게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니, 아직은 그보다도 더 이전의 이야기다. 가볍고 귀여운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 꿈은 2007년의 꿈들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가볍고 귀엽다. 영화 볼륨을 키운 채 잠들었더니 꿈속에 외국인만 나왔다는 것도, 본의 아니게 핫도그 가게에 나란히 서 있었다는 것도 왠지 웃기고 사랑스럽다. 큰 사건은 없는데 이상하게 장면이 또렷하다. 케첩을 뿌리는 손놀림까지도.
이 꿈을 꾸고 난 먼 훗날인 2015년, 미국 동부로 여행을 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바다 옆에 있는 놀이동산과 원더 휠을 직접 눈으로 보겠다고, 지하철을 타고 코니 아일랜드역 바닷가까지 찾아가 이 꿈과 비슷한 핫도그 집에서 핫도그 하나를 덜렁 사 먹고 돌아왔던 기억. 지금 생각하면 그날의 나는, 오래전 꿈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장면을 뒤늦게 현실에서 한 번 만져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2008.03.15
샤워하고 나와 거울을 보자 왼쪽 눈 밑에 상처가 나 있었다.
기분이 겁나 미묘해졌다.
피는 안 나고, 왜 이 상처가 났는가 꿈속에서 계속 생각하다가
오랜만에 그 사람을 만났다. 꿈속에서 만난 건 처음이었는데
어색하게 웃으면서
“눈 밑에 상처가 생겨버렸는데 왜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적당한 안부를 묻고, 어째서 눈 밑에 상처가 생겼을까라는
생각만 했다.
꿈속에서 내내 그 사람 앞에 앉아서
“왜 생긴 거지? 아 정말 모르겠네” 등 따위를 내뱉다가 눈을 떴다.
감정태그 : 슬픔
사실 이 꿈은 실제로 왼쪽 눈 밑에 상처가 나 있었고, 그걸 계속 왜 생겼지 고민하다가 결국 꿈까지 꿔버린 건지, 아니면 꿈속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그 상처를 처음 발견한 건지조차 모호하다. 그리고 시간 차가 꽤 있지만, 내가 나라서 알 수 있는 ‘그 사람’을 유추할 수는 있다. 청소년 때 처음으로 만났던 ‘남자’ 친구였다.
그땐 감정과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때이기도 해서, 내 눈앞에 걸린 그 대상을 좋아하고 싶었다. 그 사람과 새벽에 주고받는 대화가 재미있었고, 위로도 잘해줬었다.
그런데 꿈의 상태와 비슷하게도, 나는 그를 앞에 두고 나 자신에 대한 고민만 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마주해야 할 트라우마, 뭐 그런 것들을.
그 꿈에서 마주친 상대를 앞에 놓고도 내게 난 이유 모를 상처가 어디서 생겼는지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정작 중요한 것은 앞에 있는데도 제대로 집중을 못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해 슬펐다. 뜬금없이 왜 그 선배가 꿈에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무 살을 처음 맞이하던 내게 필요한 꿈이었던 걸까.
이 상처는 무슨 의미였을까. 모든 관계에 방어적이며 어디까지 나의 모습을 꺼내 보여줄 수 있을지 재보던 어린 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메타포인 걸까. 오랜만에 만난 그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그 사람 앞에서도 결국 나는 내 상처의 원인만 궁금해하며 내재된 상처만 되짚어보는 그런 모습.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나가기 전부터 곪아오던 자기 자신의 문제가 올라와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위태로운 상태였다. 스무 살을 맞이한 초반의 내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한 꿈이라 마음이 아팠네.
2008.06.09
네가 나왔다. 아침이 돼서야 대충 과제의 할당분량을 맞췄기 때문에 빨리 잠들었어야 했는데, 라스트 프렌즈까지 보고 자겠다는 욕심에 결국 보고서 자서 7시께가 조금 넘은 시간에 잤다. 오랜만에 모습을 내비쳐서 반갑긴 했다. 왜냐면 난 아주 내가 잊어버리고 산 줄 알았거든. 그치만 여전히 있다고, 바둥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보며 너는 웃었다. 솔직히 그 장면밖에 기억이 안 난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눈을 떴을 땐, 오후 3시가 훌쩍 지나 있었고 나는 그 꿈을 꿨던 것을 조금 비웃었다. —–아니라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안 했다. 그렇게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마주친 일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솔직히 그 동네께에 가면, 언젠가 몇 번은 긴장도 했었는데. 일단 큰 과제 하나는 끝내서 다행이긴 한데, 나머지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네. 하기가 싫어졌다.
감정태그 : 외로움, 그리움
행복한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웃는 장면 하나만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잊은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있다는 건, 아마도 아주 어릴 때 내게 이상적인 관계를 처음 보여준 그 친구에 대한 꿈이 맞을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관계를 아주 어렸을 때 내게 꾸려준 고마운 친구였으니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한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 친구에 대한 꿈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을 더 크게 그리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제와 피로가 겹친 상태에서 이런 꿈을 꿨다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2008년 입학하고 나서의 나는 대학 안에서 흐르는 대로 다니고, 주어지는 대로 관계를 맺으며 지냈던 것 같다. 같은 과 친구들과 사이는 좋았지만, 모든 걸 내보일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깊게 연결된 관계에 대한 갈증이 더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마주친 일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고 적은 건, 같은 동네, 같은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아쉬움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2008.06.16
일요일 하루의 의미 없는 포인트는 꿈에 하이도가 나왔다는 것.
진짜 왜 나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뭐지. 그리고 엄청나게 체했다.
엄지손가락을 몇 번을 찔렀는지 모른다. 피가 시원하게 나서 소화가 되길 바랐지만,
바늘로 찌르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대인배가 되지 못한 난 제대로 못 찔렀다.
빗겨 나가거나, 얇게만 찔려서 피도 감질맛나게 났다. 대실패다.
그냥 그래서 집에 있던 콜라 한 병을 비웠다. 본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암호.
남은 9.
살인적인 괴로움과 마음난리에 대처할 수 있을. 날 위해.
상자 속에 들어있던 10. 앞으로 아홉.
감정태그 : 자기애
꿈속에서 라르크 앙 시엘의 하이도를 본 꿈을 꿨구나. 의미 없는 포인트라고 하지만, 의미가 있기에 적어뒀겠지.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
꿈일기의 내용보다, 이 기록은 잠에서 깨어난 뒤 좋지 못한 몸 상태에 대한 기록이 더 중심이 되는 글이다. 전날의 나는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하루를 보냈기에 저런 꿈을 꾸고 저토록 컨디션 난조를 겪었던 걸까. 몸을 케어하는 방식도 서툰 스무 살의 망아지 같은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암호문처럼 일기를 남기는 방식 또한 자기애가 넘쳐 보인다. 9라는 숫자와 10, 앞으로 아홉이라는 말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
2008.06.29
죽은 듯이 하루 종일 잠잤다. 밀린 잠을 해결했다.
꿈속에서 오랜만에 생각지 못한 인물을 만났다.
아마도 17살과 18살이 섞여 있는 공간에 있었던 것 같다.
꿈속 인물에게 지금 꿈속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웃었는데 웃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정말 특이하게 꿈에 대해서 그 사람과 얼마나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기억에 남는 꿈을 꿨다. 안 잊혀지는 꿈들이 꼭 있다.
감정태그 : 그리움, 외로움
누구에 대한 꿈을 꾼 건지 이번엔 모르겠다. 17과 18이 섞여 있다면, 그 사이 어드매에 내게 영향을 준 대상일 텐데. 지나간 시절의 어떤 이에게 지금 꿈속이라고 말하고,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꿈. 그렇게 꿈속에서 그 인물에게 여기가 꿈이라는 걸 알려주면, 그 대상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지까지 궁금해진다.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꿈의 표면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그 넓어진 표면 위로 기쁨과 상처, 오래된 그리움과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렇다면 2008년의 여름과 그 이후의 나는 또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