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화내고, 자책하고 있을 엄마들에게
앞서 아이에게 화내고 윽박질렀으나 이내 후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화를 내지 않고 아이를 보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주제의 글이었어요. 그러나 육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제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읽던 책을 내려두고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키울 수 있다.”라고 항의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아이가 부모를 화나게 만드는지’에 관해 설명하려 합니다. 이제 곧, 여러분의 미래가 될 이야기이니 잘 들어주세요.
육아를 할 때 가장 힘든 것, 다시 말해 부모의 인내심을 자극하는 아이의 대표적인 행동은 ‘울음’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그저 ‘기초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울지만, 조금씩 자아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음에, 단순한 짜증을 넘어 ‘분노’를 담아 우는 경우를 보게 되죠.
물론, 처음에는 우는 모습조차 귀엽습니다. 방울방울 눈물을 짜내는 표정이 사랑스럽기까지 하죠. 그러나 ‘반복’되면 이것만큼 고역이 없습니다. 매일 쉬지 않고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죠.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반복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수용소는 쿠바 남동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미 해군시설입니다. 별다른 재판 없이 이루어진 구금 활동 때문에 UN의 거센 폐쇄 권고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여러 기관에게 ‘고문’ 및 ‘학대’ 의혹을 받고 있죠.
그런데 이 기관에서 시행된 ‘고문’ 중에 ‘서세미 스트리트’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면 믿어지나요? 서세미 스트리트 하면, 빨간색 털에 주황색 코를 가진 귀여운 ‘엘모’가 떠올라야 정상이에요. 그런데 유아의 학습을 위한 프로그램이, 이 시설에서는 조금 다르게 사용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관타나모의 교도관들은 우리의 ‘엘모’를 고문에 사용하였을까요. 미국 내부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관타나모의 수감자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수일 이상 헤드폰으로 ‘엘모’를 만났습니다. 잠깐 동안 귓가에 맴도는 서세미 스트리트는 견딜만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몇 시간도 아닌 며칠 동안 두 귀를 통해 억지로 흘러 들어오는 엘모의 목소리는 서서히 수감자들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복 청취를 통해, 즐겁게 영어를 가르쳐주던 ‘서세미 스트리트’는 무시무시한 ‘고문의 도구’로 전락된 것이죠.
반복의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음악을 들으며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곤 합니다. 이때 주로 이용하는 방식은 ‘스트리밍 형식’의 유료 음원 사이트예요.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기 전에는 어땠냐고요? 2000대를 풍미한 ‘CD PLAYER’를 이용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교했을 때 CD가 주는 풍부한 음감을 포기한 것은 내심 아쉽지만,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났기에 지금은 만족하고 있어요.
사실, CD PLAYER로 노래를 듣다 보면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라 할지라도)어느 순간 ‘한계’가 옵니다. 같은 CD를 여러 번 감상하다 보면 첫 번째 증상으로 “다음엔 ‘이곡’이 시작되겠구나.”라고 예측할 수 있죠.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좀 더 들으면 예측을 넘어 노래 중간중간 ‘귀에 거슬리는 멜로디’가 생기게 되고, 한계점에 다다르면 결국 좋아하던 음악을 듣는 게 힘들어지죠. 반복해서 들었을 뿐인데 좋아하던 음악이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노래로 바뀌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두 사례에서처럼 ‘반복’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육아도 다르지 않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이의 사랑스러운 울음소리를 처음부터 싫어한 것은 아닙니다. ‘짜증 내던 모습’조차 예뻐 보였던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반복되는 ‘자극’에 버텨낼 장사는 없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며, 꼭 중요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를 잡고 울면서 놓아주지 않는 아이를 계속해서 받아주다 보면, 인내심은 곧 한계에 다다르게 되죠. 정신을 차려보면 아이에게 화를 내는 나를 보게 되고, 이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 ‘이성의 끊을 놓는 경험’은 육아를 하는 내내 계속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마지막으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실질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조차 우는 아이를 달래는 부모를 보며, 자신이 부모가 될 만큼의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가 한계에 다다르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