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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일럿대디 Nov 13. 2018

아빠도 피하지 못한 주부우울증

따듯한 위로의 말 한마디면 충분해요

육아와 가사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제게 원치 않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바로 우울증을.


육아를 처음 시작할 즈음 가졌던 자신감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든 아이를 보며 내일은 또 어떻게 버티나 하는 한숨만 나오는 그런 상태에요. 지금에 와서 육아를 한 줄로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육아는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라고요.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밀고, 이유식을 준비하고, 병원을 가고, 시장을 보고, 저녁 준비를 하고, 아이와 놀아주고, 내일 아침을 준비하는, 이 페이지를 전체를 할애해도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할일이 많습니다. 일만도 벅찬데,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상대하다 보면 정신마저 피폐해지죠.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보는 힘듦에 비례해 우울한 감정이 수시로 찾아왔어요.


물론 처음부터 우울한 감정이 제 마음속에 자리 잡지는 못했습니다. 여우비 같이 갑자기 쏟아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점점 구름 낀 날이 늘어나더니 좀처럼 햇살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제 마음은 ‘흐림’이 계속되었죠.   


아이를 향해 웃어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울어도 달래줄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육아를 하면서 흥미로운 일은 더 이상 없었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두려워만 갔으니까요.

식사 시간도 부족하고 식욕도 없어진 탓에 처음 불어났던 체중은, 다시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아이는 밤낮 가리지 않고 저만 찾았고, 감당하기 벅찬 육아를 하다 보니 피로는 계속 쌓여 만성피로의 단계가 되었네요.

매사에 의욕이 없는 제가 한심스러워 “내가 이러려고 ‘육아휴직’을 했나!”하는 생각으로 힘을내보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더 우울해질 뿐이에요.


이런 감정상태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아내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무던한 성격의 아내가 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감정 변화’를 알아챘는지 여전히 의문이네요. 그렇기에 아내가 처음으로 준비해준 선물을 예상하지 못했겠죠. 무작정 참기만 하다, 언젠가 한번 용기 내 이야기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을 준비합니다. 밥은 잘 먹지 않기에 간단하게 토스트를 만들어 보았어요. 그러나 저녁이 문제예요. 식빵을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식재료라곤 양파 하나 두부 반모가 전부입니다. 매번 얻어온 반찬만 내놓아 미안한 마음도 있고, 며칠 전부터 어묵탕이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나, 저를 채근해 아이를 들쳐 매고 장보러 가요.


예전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이제는 요령이 생겨, 아이에게 잠기운이 온다 싶을 때 외출을 나섭니다. 제 예상대로 아이는 금방 잠들었고, 큰 무리 없이 식재료를 장바구니 한가득 담아 돌아왔어요. 다만 아이와 함께 장을 보다 보니, 몇 배는 더 조심하며 다니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제시간에 저녁을 준비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해 봅니다.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와요. 짐도 무거운데 아이도 안고 있자니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도 숨이 차지만, 아내가 오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조금 더 힘내야 합니다. 이제 곧 아이도 낮잠에서 깰 때가 되었네요.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저녁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관에 도착했습니다. 열쇄가 어디 있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빼꼼히 현관문이 열리네요. 아내가 맞아줍니다. 너무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말없이 웃으며 아이를 받아주네요. 얼떨결에 집으로 들어와 보니 코끝을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가 온 공간에 가득합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 했다네요. 늦지 않게 저녁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몰아붙였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식탁위에는 따듯한 밥과 찌게 그리고 장모님 표 반찬 몇 개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김치찌개입니다. 분명 다른 사람이 보기에 진수성찬은 아니에요. 평범하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저녁상입니다.

자기가 아이를 볼 테니 먼저 먹으라는 말에 식탁 앞에 앉았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게 때문이었을까요, 숟가락을 들어야 하는데 눈앞이 흐려져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손으로 더듬어 숟가락을 들고 찌게로 향합니다. 이제 막 한입 먹으려 하는데 얼굴에 따듯한 것이 느껴져요. 찌개를 흘린 것은 아닌데, 하며 닦아 봅니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는데....... 음식이 식기 전에 먹어야 하는데, 도저히 입에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식탁에 앉아 한참, 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한번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고, 아내는 그런 저를 말없이 안아줍니다. 그날 제가 운 이유는, 식어버린 밥에 익숙해져, 누군가 차려준 ‘따듯한 밥에 낯설어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게 ‘여름날의 감기’ 같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아내는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가사의 분담은 물론이고 저녁시간의 육아도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런 배려조차 부담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긴 시간은 저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아내는 수시로 제 감정상태를 물어봐 주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려고 배려해주었죠.


저를 향한 사려 깊은 배려는 제 마음속에 가시 돋쳤던 “가사와 육아는 나만의 것”이라는 생각을 없애주었습니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오는 생각에서 해방되자 좀 더 자유로워졌고, 우울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아무래도 제가 겪은 이러한 감정의 변화는,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우울증의 전형적인 패턴인 듯합니다. 주로 ‘무기력한 기분’에서 시작되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꾸 일을 미루거나 실수하는 일이 많아지고, 자꾸 반복되는 실수는 부정적인 자기평가로 이어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면부족과 만성피로는 심한 감정 기복을 가져왔죠. 이러한 감정이 오랜시간 지속되다 보면, 우울한 감정이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우울증’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 이른 시기에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우울의 고리’가 끊어진 케이스죠. 부정적 생각이 강화되고 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 생각들이 틀렸음’을 아내가 말해주자,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부정적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때,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한마디는 반복되는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따듯하게 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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