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케이크, 커피 그리고 900원

by 필석


'CJ 대한통운 택배 이동 중, 출발지 충남 보령, 명칭 900원, 현재 위치 곤지암HUb '
웹사이트에서 택배 배송조회를 하다가 고개가 갸웃했다. 명칭 900원? 내가 시킨 건 딸기 케이크인데.
나는 제때 배송되지 않은 딸기 케이크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이었다. SNS에서 딸기 케이크 배송을 시작한다는 충남의 한 딸기농장 글을 우연히 보고 홀린 듯 주문했기 때문이다. 새빨갛고 커다란 딸기들이 왕창 올라간, 동물성 생크림을 넣어 만든 딸기 케이크라니, 딸기 케이크 애찬론자(Lover)로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글에 혹한 것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홍보 글은 여러 사람을 거쳐 회자 되었고 오픈 날 몇 시간 만에 12월 중순부터 말일까지의 주문이 모두 매진되었다. 주문 오픈 글 밑으로는 좋은 가격에 맛있는 딸기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느니,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시켰다느니 하는 기대감과 약간의 흥분감이 섞인 댓글들로 왁자지껄했는데 곳곳에는 주문에 실패한 사람들의 아쉬움 섞인 댓글들도 있었다.
나는 가장 이른 날짜로 주문에 성공하여 이틀 뒤면은 맛있는 딸기 케이크를 배달받을 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첫 배송 사업이라 그런지 첫날부터 배송에 문제가 생겼다. 하루 200개 한정으로 받은 주문 건수 중 절반이 배송사고로 배달되지 못했고, 그중에는 내 딸기 케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었으나 다시 만들어 그다음 날 배송해주겠다는 약속 문자를 받고 마음을 달랬는데 기대감이 크면 실망감도 큰 걸까, 배송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판매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왜 사업을 시작했냐’, ‘사장님 때문에 좋은 날 준비를 망쳤다’로 시작된 말들은 급기야 이후 주문자들의 불안까지 증폭시키며 ‘왜 연락이 잘 안 되냐’, ‘제때 배송 오는 것 맞냐’, ‘실망이다’로 연결되더니 종국에는 이와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참전하며 SNS를 달궜다. 비당사자들은 대부분 무얼 믿고 SNS에서 음식을 시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주문자들의 인지능력을 조롱했고, 이때다 싶은 전국 곳곳의 딸기 케이크 집들은 사진까지 첨부해 자기네의 딸기 케이크는 무슨 재료로 만들며 언제든 주문 가능하다고 숟가락을 얹었다. 더 나아가 딸기 케이크는 택배가 절대 불가능하며, 사진 속 딸기 케이크는 베이커리라고 부를 수 없다는 훈계까지. 여러모로 시끄러운 연말이었다.
손쉽게 타자를 쳐 자기 생각을 표출하는 것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오래간만에 시작한 SNS가 다정하고 따스워서 좋았는데 한순간에 바뀌는 여론과 화살처럼 꽂히는 비난, 조롱을 겪다 보니 SNS가, 아니, 사람이 참 무섭기도 했다. 그냥 맛있어 보이는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었던 것뿐인데, 처음 해보는 사업이라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것뿐인데, 주문이든 사업이든 뭐든 제대로 판단 못한 한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그 케이크였다.

도착 예정 날 아침, 조회해본 택배는 여전히 곤지암이었는데 나를 신경 쓰이게 한 건 900원이라는 글자였다. 택배사에서 판매자에게 배상하기로 한 금액일까, 판매자가 추가로 낸 비용일까? 궁금했지만 알 도리는 없었고, 내가 900원이 아니라 900원이라 이름 붙여진 딸기 케이크를 받기를 바라며 집 근처 카페에 들어섰다.
오픈 시간이라지만 이상하게 카페 내부가 어수선했다. 자주 가는 그 카페는 늘 이른 아침에도 여러 빵이 준비되어 있고 직원들이 친절히 인사를 하는 곳이었는데 바닥 곳곳에는 박스들이 쌓여있고 어느 누구 하나 내게 시선을 주거나 알은체하지 않았다. 주문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용기 내 주문을 이따 할까요? 라고 물으니 연말이라 택배가 많다는 말이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해 위층에 올라가 앉았다. 여느 12월의 아침처럼 창밖으로 도톰한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SNS를 보니 판매자는 물밀듯이 들어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지쳤는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다 응답을 멈춘 상태였다. 밑층의 소리가 잠잠해져 모닝 세트를 주문하는데, 기다려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고 싶다는 말이 돌아왔다. 괜찮다고 사양하다 감사하다고 영수증을 받고 보니 계산금액에서 커피 가격이 빠져있었다. 빠진 금액은 900원, 모닝 세트의 커피 가격은 900원이었다. 올라와 9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900원 딸기 케이크를 떠올렸다. 온 세상이 나를 향해 900원을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900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900원, 꽉 채운 하나의 단위가 되기 직전으로 1,000원이 되기엔 조금은 부족하지만 100원이 9개나 모여야 될 수 있는 금액. 어디에 대입해도 적은 숫자는 아닌 9는 한 단위가 그다음 단위로 넘어가는 발판 같은 역할을 하는 숫자.
때마침 그때 나는 새로운 한 해를 앞두고 있었고, 기존에 해오던 것과 새로 할 것들을 정돈하며 나의 끈기를 지레 염려하던 중이었으므로 그 숫자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도 그런 시기가 아닐까. 동전 단위에서 지폐로 넘어가기 직전, 그런 시기라는 걸 우주가 온 힘을 다해 알려주고 있는 게 아닐까. 9는 새로운 단위의 1을 만들고 끝자리는 다시 0으로 만들어주니까, 새해에는 그런 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연말이었다. 그날따라 눈에 띄었던 딸기 케이크 글과, 하필 이름에 900원으로 입력된 택배이름과, 그날따라 이상했던 카페, 그리고 맛있는 900원짜리 커피 덕분에.

900원 딸기 케이크는 저녁 무렵 집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느낌의 포장지를 뜯고, 온갖 사연과 감정으로 점철된 딸기 케이크를 마주했다. 남편을 앉혀두고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레 한 조각을 잘라 접시에 담고 연말을 축하했다. 케이크는 기대만큼 맛있었다.
판매자에게 예쁘게 자른 딸기 케이크 사진을 문자와 함께 보냈다. '잘 도착했습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곧이어 답장이 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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