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면 잠에서 깬다. 직장을 다닐 때는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자기 위해 노력했었기에 전례 없던 일이다. 직장을 쉬기로 한 뒤, 내게는 넘치는 시간이 주어졌다. ‘시간만 나봐라.’ 단단히 벼렸는데 막상 시간이 생기자 ‘뭘 하면 좋을까’를 두고 마음이 뒤죽박죽 어지러웠다. ‘곧 무엇이든지 하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이 시간을 알차게 써야 하는 건 아닐까’하며 또 다시 출근하듯 지내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곤 다짐했다. 이 시간만큼은 무얼 하든 성패를 가르지 않고, 마음이 끌리는 것을 하기로.
하지만 다짐은 다짐이고, 야속하게도 내 몸은 새벽마다 말똥해져 나를 고요한 집 안에서 홀로 깨어있게 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을 시간에 눈이 떠지면 마치 지구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부유하다 그것마저 지겨워질 때면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고 기지개도 켰지만 시간은 여전히 느리게 갔다. 새벽마다 집에서 뭉그적거리기를 여러 차례, 어느 날 무작정 옷을 꿰차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동네를 덮은 어스름한 어둠을 가로등이 밝히고 있었다.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시간, 평소 아이들과 차 소리로 떠들썩하던 거리가 내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가만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그때서야 비로소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고양이가 유유히 지나가는 걸 보고, 아직은 조금 후덥지근한 공기를 느꼈다. 수없이 지나다닌 동네의 낯선 모습이었다. 땀을 살짝 흘리며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 산책로에 도착해있었다.
집 근처 산책로는 천을 따라 길게 양옆으로 이어진다. 아름드리 나무들과 수많은 꽃이 있어 계절별 멋이 남달라 데이트 장소로도 꽤 유명한데, 해가 떠 있지 않을 때의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늦여름, 비가 온 뒤 산책로의 초목들은 짙은 녹색을 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며 바닥을 적실 때, 짙은 풀 내음이 훅하고 들어오며 풀벌레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음이 편안했다.
그렇게 이른 아침 산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끔 늦을 때도 있지만 보통 5시 반이면 집을 나서니 이를테면 새벽 산책이다. 집 근처 골목길들을 지나 산책길까지 접어 들어가는 15분 동안 동네의 맨얼굴을 눈에 담는다. 늘 열려있던 가게들도 불이 꺼지고, 푸르스름한 빛이 덮인 시간, 내 발소리만이 그 적막을 깬다. 새벽 시간 동네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부스스한 느낌이다. 나는 이방인이 되어 이곳 저곳을 낯설게, 찬찬히 보기 시작한다. 직장인의 정체성을 한 꺼풀 벗겨내니 내가 보이듯, 새로운 동네의 모습이 보인다.
한 달쯤 되니 동네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게 되었다. 어느 빵집이 6시면 매일 불을 켜고 빵을 굽는지, 어디에 고양이 물그릇이 놓여있는지, 어느 집에 멋진 조경수가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10년이 넘게 이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그 모습들을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알게 된 것들을 가만히 살피며 곱씹다 보면 내가 보였다.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을 알게 되고, 숨겨진 생각들을 발견했다. 산책이 좋아졌다.
이제는 익숙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간을 너무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서두르라고 재촉하지 않지만 조금 늘어지기 시작하면, 금세 나른해지며 시간을 훌쩍 흘려보내 해가 떠버리기 때문이다. 아직 동네가 완전히 깨기 전에 나가기 위해 준비 시간은 무조건 10분 안쪽이다. 올해 날씨는 생각보다 더위가 오래 가 바스락거리는 민소매 원피스를 유니폼처럼 9월까지 입고 다녔다. ‘뭘 할까’를 고민하며 이것저것 기웃거린 날들이다.
9월이 지나면서 날씨가 부쩍 선선해졌다. 여름에 내리지 못하던 비가 늦게서야 빚 갚듯 오더니 새벽 공기가 제법 차갑다. 지난주부터는 여름내 입고 다녔던 여름 원피스를 보내주고 긴팔의 추리닝 세트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아직 이 정도는 아닌가?’ 갸웃거렸는데 이제는 딱 적당한 차림이 되었다. 산책로의 초목들도 어느새 가을옷을 꺼내입기 시작했다. 하고 싶던 것들도 순항 중이다.
바야흐로 가을의 시간, 가을의 정취가 묻어나기 시작한 산책길을 오늘은 조금 더 오래 걸어본다.
가을 산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