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왜 '영포티' 상사를 견디지 못하는가?

[청년실격] - Ep.02 : 40대 상사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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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세대를 전부 비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 순수하게 저와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경험담 그리고 제 개인적인 견해를 최대한 담백하게 적으려 했습니다. 아무리 제게 부정적인 경험이 많아도 모든 분들을 일반화하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든든하게 나를 이끌어준 연장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학창 시절, 나는 동갑내기의 또래 친구나 동생보다 형들과 어울려 다니는 게 더 좋았었다. 당시 내 인복이 좋아서였을까, 그때 내 기억 속의 연장자는 무늬만 성인이었던 대학생 망나니인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처음에는 그들도 사람인지라 화를 내다가 대화가 이어질수록 되려 잘못의 주범인 나에게 사과를 건네었었다. 그 형이 따스하게 먼저 손을 내민 이유는 단순했다. 연장자로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해 본인이 아끼는 동생과 '감정상하는 상황' 자체를 만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는 이유였다. 이 일을 기점으로 나는 '자기중심적인 망나니' 생활을 청산하고 인생 처음으로 '리더십의 원형'에 대해 깊은 고민을 시작한 첫 순간이었다.



1. 그러나 세월이 흘러 사회라는 정글에서 만난 '연장자'들은
내가 알던 그 모습과 180°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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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는 유독 상사 복이 없다고 느낀다. 물론 회사생활이라는 게 부하 복, 일 복 등 많은 요소들이 '랜덤 인카운터'라지만 유난히 이 악운이 어느 직장으로 이직하던지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특히 40대 상급자를 향한 마음은 커리어가 쌓여갈수록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간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50대 부장급 이상을 대하는 게 마음 편할 때가 많다. 적어도 그들은 예측가능한 '일기예보' 같다. 권위적이지만, 이를 존중하고 대화를 경청하는 척만 해줘도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다 가끔은 조카나 자식뻘이라고 온정을 베풀기도 한다.


반면 나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대상은 40대 상사다. 최근 사회적으로 급부상한 '영포티(Young Forty)'라는 표현은 이들의 모순적 특징을 꽤나 정확하게 짚어낸다. 50대 기성세대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면, 현시대 40대 상사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종잡을 수 없는 '기상이변'처럼 다가온다.


내가 직접 당한 경우를 예시로 들자면 잡담 시간이나 회식 자리에서 그들은 애매하게 철 지난 유행어와 밈(Meme)을 던지며 부하 직원들의 호응을 유도한다. 마치 자신은 여전히 젊은 세대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눈치이다. 이처럼 본인의 '꼰대' 본성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트렌드에 민감한 척한다. 스스로 20-30 세대, 흔히 일컫는 'MZ 세대'와 격의 없는 소통이 가능한 '형', '누나'뻘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위태로운 자기 최면을 바라보는 우리는 괴롭다. 영포티들의 방식은 젊은 세대 부하직원에게 결코 '소통'이 아니다. 본인들이 억지로 벼락치기 학습한 철 지난 트렌드를 정답인 것처럼 우리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려는 이른바, '학습형 꼰대'의 기괴한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업무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의사 결정 순간에는 50대보다 보수적으로 더 꽉 막혔으며, 본인 의견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결재(컨펌)를 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업무 외적인 영역에서도 부하직원에게 기성세대보다 더 많은 의전을 바란다. 경험에 의한 주관적 불호를 조금 더 보태자면, 오히려 중후한 중년의 '아저씨 룩'이 훨씬 자연스러움에도 억지로 최신 스트리트 패션을 욱여넣는 듯한 그 기괴한 부조화가 우리 세대를 되려 당혹스럽게 만든다.


명확하게 결론을 내자면, 차라리 솔직한 늙은 꼰대가 낫다. 트렌디한 척하면서 억지 소통을 강요하는 젊은 꼰대야 말로 맞장구쳐주기조차 피곤하다.



지인이 전에 몸담았던 회사 대표인, 스스로를 '크리스틴'(가명)이라 부르길 강요한 그녀가 딱 그런 예시였다.


중소 규모 화장품 회사 CEO였던 그녀는 트렌드에 유독 민감하게 굴었다.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은 자신의 톤 앤 매너와 맞지 않아도 억지로 욱여넣었고, 자신의 회사 브랜드 이름 끝에는 기어코 "in New York"을 갖다 붙였으며, 사무실 블루투스 스피커엔 항상 외국 팝송이 BGM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가장 코미디인 것은, 정작 그녀가 제대로 된 영어를 단 한마디도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표 책상 위에는 <뉴욕 타임스> 같은 외신이나 글로벌 시장 트렌드 분석 리포트 대신 한글로 쓰인 <성공하는 CEO>처럼 뻔한 자기 계발 서적이 자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를 '글로벌 리더'라 굳게 믿는 듯했다.

그러나 자기애적 구성요소로 애써 포장한 '글로벌 이미지'는 실무가 시작되는 순간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인하우스 마케팅 기획을 올리면, SNS에서 우연히 목격한 레퍼런스를 들이밀며 직원들이 애써 공들여 짜둔 기존의 방향을 가차 없이 엎어버린다. 명색이 대표임에도 사내 업무 프로세스를 깡그리 무시하고는 'Why'나 'How'는 생략한 채 오직 'When'만 외쳐댄다. 그것도 "당장!"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입으로는 '얼라인', '디벨롭', '랩업' 같은 업무 용어를 인위적인 꼬부랑 발음으로 매번 남발하지만, 정작 본인 기대보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OO 씨가 능력이 없어서 그렇잖아!"라며 구체적인 피드백 없이 말단 직원의 자존심을 긁기만 할 뿐이다. 이토록 걸쭉하게 고함을 칠 때면 '글로벌 리더'는 온데간데없고 영락없는 '조선시대 주막의 주모'가 따로 없다.

어쨌든 회사는 굴러가야 하고 브랜드를 구축해야 하니, 나름 업계에서 제대로 구른 40대 경력직 부장과 C레벨을 비싼 급여로 모셔온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직 초기 핸드오버를 거치며 CEO의 무능과 불통에 기겁한다. 그리고 이내 적당히 비위나 맞추며 급여를 축내는 속칭 '월급 루팡'으로 태세를 전환한다. 나름 이들도 마음 한 구석 양심이 찔리는지 상처 입은 젊은 말단 직원들을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대표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거 알지? 겉멋만 들어서 저러는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너도 대충 비위만 맞추고 월급이나 타먹어."

이는 딱 대표가 부재한 날 탕비실에서 그녀의 뒷담화를 할 때까지만 나오는 위로였다. 정작 회의실에서는 대표의 말도 안 되는 화살이 쏟아질 때 실무자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젊은 직원들 입장에서는 이들도 밉기는 매한가지, 아니 오히려 위기를 회피하는 더욱 질 나쁜 방관자로 느껴질 뿐이었다.

당연히 이런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점점 실적은 저조해지고 각종 노출 지표는 브랜드 오픈 초기임에도 바닥을 긴다. 이 참담한 결과에 또다시 갈굼 당하는 건 역시나 제일 만만한 말단 직원들이다. "마케팅을 할 줄 몰라서 그래", "내 말대로 했으면 이렇게 안 됐을 텐데" 이제 언어폭력은 템플릿화 되어 예측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영어 이름을 쓰지만 소통 방식은 조선시대 주막에 머물러있는 그녀의 어이없는 연극 무대에 엑스트라로 남겨진 직원들은 오늘도 조용히 '퇴사 버튼'을 만지작거린다.

그곳엔 뉴욕도, 혁신도 그리고 어른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들은 지금처럼 모순적이고 기이하게 변해버렸을까? 단순히 그들이 나쁜 본성의 소유자라 그럴까? 그들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며 이해할 수 있는 바로 아래 세대의 시선으로 머리를 식히고 그들이 통과해 온 시대를 들여다보면, 나름 묘한 연민이 피어오르는 교차점을 발견하게 된다.



1) 비겁함이 곧 생존이었던 IMF의 목격자

지금의 40대는 어린 시절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집안을 든든히 지탱하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는 걸 목격했다. 그 이후에는 2008년경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즉, 현재의 40대는 이 거대한 두 번의 거시적 경제 위기 속에서 학창 시절부터 청년기의 가치관을 형성한 셈이다.


쉽게 정리해 보자면 어릴 때는 밥상머리에서 무너지는 아버지를 목격하고, 청년이 되어서는 본인들의 이력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겪었다. 정리해고되어 짐을 싸서 돌아온 아버지의 어깨를 바라보며 "평생직장은 허구이고, 조직은 개인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뼈아픈 현실을 일찍 깨달았다. 이후 대학생이 된 그들은 그토록 그리던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뒤로하고 '생존형 스펙 경쟁'의 장에 내몰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자격증만을 쌓아 올렸다. '88만 원 세대'와 '비정규직'이라는 악몽이 그들의 청춘을 덮친 것이다.


그나마 바늘구멍과 같은 취업 문을 뚫고 입성한 직장 역시 권위주위가 살아 숨 쉬는 정글이었다. 당시 40대였던 기성세대(현재의 50-60세대)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납작 엎드려 줄을 서고 눈치를 보는 정치적 생존 수단을 갈고닦았다. 조직의 부당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절대 "NO"를 외칠 수 없었다. '비겁함이 곧 생존'이라는 처절한 공식이 뼛속 깊이 새겨졌다. 이렇게 그들은 강제로 불의와 스트레스를 묵묵히 감내해야만 하는 비겁한 '방관자'이자 기성세대의 낡은 관행을 답습하는 '전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생각보다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는 구조적 불평등에서 발생한 사회 변화 추세로 자연스럽게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다. 그러나 지금의 40대들은 취업 전후로 가정을 꾸리는 건 보편적 미덕인 시대를 살았기에, 대부분 이미 자신의 가정을 형성한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주택 관련 대출금이 '인질'로 잡혀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이 거대한 사회 변화라는 '협박범'에게 맞서 소신을 외치라는 건 어쩌면 너무나 가혹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2) 디지털 이민자에서 '딸깍'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디지털 도태자로

지금의 40대는 처음으로 'MSN', '세이클럽' 같은 생소한 메신저로 소통했다. '싸이월드'와 같은 초기 메타버스 플랫폼을 접한 SNS 1세대 사용자이기도 하다. 2009년 말 아이폰3GS가 정식 수입되고 경쟁자인 갤럭시 S2 이후로 스마트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자, 자연스럽게 모바일 부가 소통수단인 '카카오톡'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세대다. 당시 거대한 기술의 변화를 앞서 체감해서일까, 여전히 본인들이 기술 패러다임에서 주류에 속해있다고 착각한다. 이 경험이 현장에서 여전히 자신이 트렌디하다 믿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그러기에 유독 사내와 개인메신저를 구분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고도화된 업무툴마저 단순한 채팅창과 같이 비슷하게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살충제를 뿌릴 시기를 놓쳐 무제한으로 증식 중인 바퀴벌레 떼처럼 늘어나는 무수한 토픽방들은 실무자의 업무 피로도를 극한으로 가중시킨다.

'노션', 클라우드, NAS의 링크를 전달하면 이를 낯설고 불편하게 여겨 "이거 캡처해서 카카오톡으로 직접 보내"라며 은근한 불쾌감을 내비친다. 비즈니스 이메일에 CC가 직급 순이 아니면 예의는 어디 갖다 팔았냐며 역정을 낸다. 마지막으로 그놈의 '전자 결재' 시스템에는 목숨을 건다.


이렇듯 도구만 디지털이고 일하는 뇌는 여전히 낡은 아날로그에 머물러 있는 '하이브리드 꼰대' 짓은 복수의 소통 채널로 협업을 꼬이게 만들고 심각한 업무 파편화를 초래한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구시대의 수기 방식만 고수하는 게 (비록 엄청나게) 비효율적 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소통 창구가 헷갈려 심각한 '휴먼 에러'가 발생할 확률은 훨씬 줄여줄 것이다.


최근 생성형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디지털 격차'는 더욱 극명하게 벌어지고 있다. 실무자들은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로직을 짜고, 프롬프트를 연구하여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를 위해 여러 AI 서비스의 장단점을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도구를 바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AI를 학습을 시켜야 하며, 플랜별로 부과되는 만만치 않는 요금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영포티 리더들은 AI가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요술 지팡이라도 되는 양, 그저 '딸깍' 한 번이면 모든 결과물이 나오는 줄 착각한다. AI는 동전만 넣으면 자동으로 결과를 뽑아주는 자판기가 아니라 유능한 실무자와 호흡을 맞춰 협업하는 '조수'에 가깝다.


이렇게 복잡한 백엔드 구조는 생각지 않고 무지성으로 결과만 내놓으라 윽박만 지르는 현실이다. 우리와 AI의 관계처럼 결국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 본인의 프롬프트(기획 의도)가 멍청하면 AI든 실무자든 쓰레기 같은 결과물만 나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3) 유효기간이 너무나 지나버린 보상 심리와 실무자의 샌드위치적 억울함

40대는 바로 윗 세대인 50대 기성세대에게 가내수공업이나 도제 방식으로 흔히 말하는 '빠따'를 맞아가며 일했던 마지막 세대다. 그들은 회사와 직장 상사에게 충성하면 적어도 미래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믿었다. 세월이 지나 40대는 회사에서 실무자부터 이사진들까지 차지하는 '핵심 의사결정자'가 되었다. 혹독한 시절을 견딘 그들은 50대에게 '복종'을 지불한 대가로 이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할 차례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새롭게 닥친 시련은 새로운 부하직원인 MZ세대와 변화한 현시대이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사 생활 내외적으로 많은 지각 변동이 발생했다.

업계마다 다르겠지만 이제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실무자에게 '수평적'인 리더십을 지향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트렌드와 관련된 업무일수록 모두가 수평적으로 일하거나 적어도 이를 지향하도록 사내 문화의 판도가 바뀌었다.

아직 자신의 머리 위에서 최상위 권력을 쥐고 낡은 충성을 요구하는 50대 임원진과, 발 밑에서는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는 젊은 세대 사이에 낀 이른바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압도적인 역량이나 합당한 명분도 없이 아랫세대에게 본인들이 50대에게 당했던 권위적인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려 든다면, 돌아오는 것은 사직서와 직장 내 괴롭힘 고발뿐이다.


성인지 감수성의 기준도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이른바 '낭만의 시대'라는 미명 아래 묵인되던 저열한 농담의 대부분은 이제 명백한 성희롱이다. 나름 40대 입장에서 순수하게 '친근함'을 표현하려 했던 행동조차 지금은 치명적인 사내 징계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실로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행동반경에 엄청난 제약이 생긴 셈이다.



결론적으로 과거 선배들에게 바쳤던 맹목적 복종과 시간이 흘러 그들이 행사하고 싶었던 보상 심리는 그 유효기간이 어느새 끝나버렸다. 이 샌드위치 신세에 대한 억울함이 40대들을 더욱 방어적이고 괴팍하게 만들었다는 시대적 배경은 조금 연민이 간다. 하지만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과거의 낡은 보상 심리에 갇혀 업데이트를 거부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선 리더의 명백한 '직무유기'이기 때문이다.






2부에서 계속…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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