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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Jun 15. 2023

거듭된 불행이든 어떻든


 일상적인 것들은 불규칙한 어떤 사건에 의해 쉽게 잠식당한다. 나는 얼마 전 인터뷰를 거쳐 끝내 채용이 거절당한 일 때문에 온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굴었는데, 사전 문답 작성을 위해 대서사시 급의- 에세이까지 써야 했던 터라 거기에 들인 시간이 새삼 허무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외면하고 미뤄둔 일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고통은 배로 늘어났다. 그동안 내 머릿속은 전쟁터였고, 한동안 고심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내 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젓가락만 대충 헹궈서 밥을 먹어 설거지는 그대로, 쓰레기는 내놓은 지 오래였다. 바닥이 왜 어지러운지 봤더니 헤어드라이어는 콘센트에 꽂아둔 지 일주일은 된 것 같다. 다행히 빨래는 제때 해두었고 그걸 개기만 하면 되니까 크게 수습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쯤이면 집안일 한 사이클 돌리면 충분히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사이즈라고 할 수 있었다.



회피가 길수록 회복도 길다


 문제는 오래도록 이 상황을 질질 끌었다는 것. 이 어지러운 상태를 눈으로 지켜보는 동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태를 넘어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하는 상태로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갔다. 너무나 당연하다. 어지럽히는 것이 나고 치우지 않는 것도 나라는 걸 부정하지 못하니까. 물론 치우지 않은 상태로 타협하고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이것을 참고 넘기기엔 나에겐 이미 나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많다. 불안한 이유가 이미 한가득인데, 거기에 보태고 싶지는 않으니까.



 주변엔 어지러운 분위기에 무던한 사람들도 있다. 특히 저마다의 어떤 임계점이 있고 그것엔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하나의 예로 내가 동료의 책상이 너무 복잡해 정신이 사납다고 말하지만 그의 기준엔 지극히 정상적인 분위기라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 나 또한 납득하는 것이, 예전의 나도 특정 상황에서 정신없음을 느끼고 바로 정리를 시작하는 문제에 한껏 풀어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상한선을 한없이 늘려 뒀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좀 더 예민해졌을 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무던함은 나만의 상한선 근처를 애매하게 맴돌다가 갑자기 선을 넘는 순간 신호가 켜지고 위기감을 느끼곤 한다. 이번에 역시나 그 위기감이 찾아왔고 정신을 차려 고민의 잔해들을 빨리 수습하기로 했다.


 일단 헤어드라이어 플러그를 뽑고 대충 벗어둔 옷을 걸고, 쓰레기를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꽤나 하기 싫은 일이지만 나는 이것들을 치워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일은 단순한 청소나 집안일이 아니라 상처받고 깨진 멘탈까지 수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날 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나 힘듦을 겪게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오늘은 오늘의 평온을 위해 집안을 치우고, 정리도 싹 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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