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나 Pina Aug 14. 2023

매우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로

 오늘은 회사에서 뒷목이 쿡쿡 쑤실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집에 들어가서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야식도 먹고 늦잠도 자고 나면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주말을 맞을 수 있겠지. 그래서 다음날은 작정한 대로 늦게 일어났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를 먹고, 다시 눕기만을 반복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결심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불안으로 끝나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중에는 최대한 피하던 자극적인 음식들을 잔뜩 먹고, 낮잠도 실컷 자면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인드를 장착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이런 식의 쉼으로 하루를 보낼 때 늘 시작은 거침이 없다. 그러다 늦은 오후쯤 되면 이게 정말 잘 쉬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슬그머니 들고 마는 것이다. 분명 가질 필요 없는 의문이고 불안함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순간엔 무언가를 해내면서 불안을 달래야 한다. 그것도 아주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로.





 가장 먼저 책상 아래 선반에서 케이블 박스를 꺼냈다. 내가 정한 별것 아닌 일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온갖 충전기, 케이블 선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아크릴 박스를 열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선을 찬찬히 감아 맞는 크기의 칸에 넣는 정말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괜히 정리할 선이 없어도 꺼내서 들여다 본적도 더러 있는데,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언제부턴가 선 정리에 무척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다. 정리를 막 시작했던 의욕 넘치던 때를 한참 지나왔을 때였는데도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 거였다. 가방 속 보조배터리에 꽂은 긴 케이블이 온갖 물건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집에 있는 전선들의 상태들. 지금껏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 비주얼은 마치 내가 처한 상황이나 혹은 앞날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멋대로 꼬여있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책상에 멀티탭 선반을 달고, 모서리엔 케이블 홀더도 붙였다. 특히 좋아하는 일은 자주 쓰는 이어폰 줄을 헝클어지지 않게 감고 파우치 안에 넣는 일이다. 잘 감긴 이어폰 줄을 볼 때마다 확실히 안정적인 기분이 든다. 이어폰 파우치 또한 별일 없이 자주 들여다보는 물건 중 하나.





 선들을 확인한 뒤엔 지갑을 살펴보는 것으로 빠르게 넘어간다. 지갑은 내내 접혀 있지만 의외로 먼지와 때가 많이 쌓이는데, 혹시 있을 안 버린 영수증이라든가 필요 없는 도장 쿠폰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 없는 화장품 정리며 책장도 뒤적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있다. 사실 예전에 스스로 정해둔 적이 있는 정리 사이클, 그중에서도 아주 좁은 범위의 일들을 해치우면서 시간을 보내면 그럭저럭 주말의 기분을 달래기에 좋다. 실은 서랍 속이 꽤 흐트러진 것 같지만 이만큼 해두기로 했다.


 저녁은 레토르트 카레로 대충 먹어두고 산책을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에 감기는 와중에도 줄이어폰과 함께 제법 빠르게 걸었던 것 같다. 자꾸만 더운 공기처럼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들이 해야 할 일로 달라붙지만 차라리 이런 가벼운 부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한여름을 통과해낼 준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