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에 들어오다 우체통에 하얀 봉투가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DM은 인스타의 다이렉트 메시지가 아니라 홍보를 위한 다이렉트 메일인 우편물이다.
디엠의 발송처를 본 순간 잊고 있던 곳에 갑자기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을 보낸 곳이 다름 아닌 강릉이었기 때문. 강릉, 비를 맞고 뛰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그 경포마라톤 주최국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실은 강릉에서 그렇게 뛰고 한동안 하프를 달리는 일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싶었는데 막상 홍보 리플렛을 받고 나니 온갖 가정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날짜는 10월초, 준비했던 여행을 다녀오고 바짝 연습을 하면 못 할 게 없지 않을까 하는 희망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마라톤 대회가 끊기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10km 정도는 대회에 나가 달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자신감이 한껏 올라왔을 때가 바로 19년 10월의 경포에서 달린 하프 마라톤이었는데, 한 번의 경험도 있고 그 즈음엔 짧은 거리나마 자주 밖으로 나갔으니까 두시간 반 빡세게 뛰고 나면 돌아오긴 하겠지 싶은 마음에 강릉행을 결정했다. 이틀 전, 전 날 비 소식으로 날씨를 걱정하다, 대회 당일 거센 빗줄기를 만나기 전 까진 그래도 어떻게든 될 줄 알았던 거였고.
대회는 취소되지 않았다. 이렇게 비가 내려도 강행을 하는구나, 얼떨떨한 심정으로 출발선에 선 다음 시작과 함께 떠밀리듯 뛰었다. 이미 흠뻑 젖은 데다 뛰는 내내 비바람이 몰아쳐 바람막이의 후드엔 빗물이 고여 흘러넘쳤다. 어떻게 뛰어갔는지 반환점을 겨우 넘어 잠깐 걷게 된 후로는 몸이 걷잡을 수 없이 추워지고 말았다. 열기는 식어버린 채 올라오지 않아 걸음이 도저히 빨라지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세차고, 도로의 차는 쌩쌩 지나가고, 주위엔 아무도 없고, 다만 앞서가는 한 명이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는 양팔을 감싼 채 덜덜 떨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비틀거리며 그 점을 쫓았다. 후에 종료지점에서 그분을 마주쳤는데 역시 나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뛸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넋이 나간 채로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줄곧 집안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머지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밖에 나서길 꺼리는 기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대신 그때 브런치에 처음 발을 들여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큰 사건을 겪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리는데 그때가 꼭 그랬던 거였다. 나는 성실한 사람은 못 되고 능력도 떨어지지만, 뛰는 일을 쉽게 그만두지도 않을 거라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까운 지인에게 다시 하프를 뛰어볼까 고민한다는 얘길 했다. 강릉에서 뛰는 것은 멋진 일이니 10km라도 뛰면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은 주저없이 하프를 뛰어보라는 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뛰러 나가야 한다 혹은 나가기 싫다는 마음이 줄다리기하는 요즘, 어떤 목표가 생기면 마음가짐이 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0km를 달린다는 건 어쩐지 매력적인 목표가 아니다. 왜 이런 우스운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나조차 이해하기가 힘들다.
결국 다시 뛰고 그만 두기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동기부여라면 연일 안 좋은 뉴스들이 들려와 언제든 위험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 재빠른 몸을 만들기 위해 짧은 거리를 뛰자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딱히 효과는 없는 것 같다. 뭔가 거창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무심하게 오래오래 뛸수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목표와 마감시간이 없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은데.
나에겐 결정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하프를 뛸까, 10킬로를 뛸까 아니면 강릉은 가지 않은 채 자체적으로 마음먹은 거리를 뛸 수 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일단 오늘은 조금이라도 뛰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