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늘이 되어준
외갓집에서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마을 입구에 큰 물버들이 몇그루 서있다. 대충 봐도 몇십, 아니 몇백 년 세월을 살았을 아름드리 나무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그늘을 만들고 있다. 그 버드나무들은 아흔이 다 되신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태어나실 무렵부터 그렇게 컸다고 한다. 어른들은 그곳을 ‘숲’이라 불렀다. ‘숲’이라 불릴 만큼 나무가 우거지지도, 많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불리었다.
'숲’이라 불리는 데는 사실 오랜 이유가 있었다. 건너편 산 아래 동네와 외갓집 동네는 나무가 없는 벌판이었다. 숲이 있어야 마을이 번창한다고 생각했던 조상들이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외갓집이 있던 위치에도 소나무가 가득 있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솔밭, '소나무 숲'이었던 것이다.
숲은 마을의 바람을 막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병약한 소나무는 거의 없어지고, 커다란 버드나무만 남은 거라고 한다. 숲은 사라졌지만 몇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사람들은 그곳을 ‘숲’이라 불러왔다.
‘숲’은 우리에겐 놀이터였다. 어린 나와 동생들은 숲에서 반지깨미(서부 경남 사투리로 ‘소꿉놀이’를 이르는 말)를 하며 놀았다. 넓은 돌판은 도마, 접시가 되고 길쭉한 돌은 방망이 내지는 공이가 되었다. 굵은 모래를 쌀 삼았고 흙탕물은 커피라 했다. 땅을 나뭇가지로 갈아엎고 정리하여 이름 모를 여린 잡초를 뿌리째 뽑아다가 심었다. 밭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숲의 버드나무가 뿌리를 내린 흙에서 할아버지의 농사를 흉내 냈다.
여름이 되면 항상 외갓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아버지께선 낚싯대에 달린 미끼와 추, 바늘을 떼고 낚싯줄 끝부분을 묶어 올가미처럼 만드셨다. 매미를 잡기 위한 도구였다. 낚싯대는 길이 조절이 되니 높은 나무 위에 있는 매미를 잡기에도 좋았다. 숲의 커다란 나무에 달라붙어있는 말매미 뒷다리에 올가미를 갖다 대면, 매미는 잡히지 않으려 우리에게 오줌을 뿌렸다. 올가미에 뒷다리가 걸려 빙빙 나는 매미를 보며 우리는 박수를 치곤 했다.
그 외의 시간엔 숲 앞의 시냇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 허물을 모으며 시간을 보냈다. 매미 허물은 날카로운 다리 끝이 그대로 남아있어 어디든 잘 붙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가슴팍에 붙이고 브로치라며 깔깔댔다. 하루는 이웃 할아버지께서 매미 허물을 모아 태우셨는데 그 냄새가 마치 오징어를 굽는 냄새와 비슷해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던 여름날, 우리는 그렇게 커갔다.
우리 어머니께서 어여쁜 아이였을 적에도 ‘숲’은 놀이터였다. 그 시절 소녀들은 모두 기다란 치마를 입었다. 냇가에 있는 작은 돌을 긴치마에 한가득 주워 담아와 숲에서 공기놀이를 했다. 공깃돌을 쌓아두고 따먹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어른들은 공기놀이를 많이 하면 그 해 흉년이 든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숲이 놀이터였다면, 어른들에게 숲은 쉼터이자 문화 공간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숲에서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새참을 먹고, 잔치를 벌였다. 숲은 그때마다 자신의 큰 가지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막내 외삼촌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70-80년대에는 숲에 천막을 친 가설극장이 1년에 2~3번씩 섰다. 당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진주엔 극장이 여러곳 있었으나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만 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곤 가끔 들어서는 숲의 가설극장이 전부였다.
공포영화, 무협, 애니메이션 등 당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영화들을 상영했다.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는 조용필, 윤수일의 노래를 틀었고, 숲 가까이 사는 주민들은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가설극장이 들어선 숲은 특별한 문화 공간이었다.
당시 우리 할아버지께서 마을 이장이셨기에 종종 집에서 마이크로 방송을 하셨다. 가설극장 측은 할아버지께 영화를 상영한다는 방송을 해달라 부탁하고 영화표를 3장씩 주곤 했다. 그렇게 받은 공짜표는 어린 막내의 손에 들어갔다. 삼촌은 그 표를 친구들에게 주고 짜장면을 얻어먹곤 했단다.
그렇게 '숲'은 오랜 시간 모두에게 추억이란 씨앗을 심었다. 노목들은 강산이 여러 번 변하는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이들이 늙어가는 모습을 수없이 봐 왔을 것이다. 부디,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도 지켜봐 주기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에도 그 숲의 푸르름이 여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