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편함을 푸는 것이 게임체인저가 되는 법
PINCH.WORK
온라인으로 못 사는 술,
오프라인 경험이 곧 무기다
2021년,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던 그때 역설적으로 '오프라인만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서 재직당시 진행한 롯데마트의 와인 전문관 프로젝트였다. 브랜드 전략부터 네이밍, 공간기획까지 전반을 담당하며 굉장히 intensive 하게 달린 6개월. 그 결과물이 지금 와인업계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보틀벙커'다.
약 200명의 소비자 설문, 전문가 인터뷰, 마켓리서치, 그리고 창고형 콘셉트로 완성된 새로운 와인 경험. 이 모든 과정 뒤에 숨어 있던 전략적 사고와 실행 과정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온라인 쇼핑이 일상화된 시대, 대형마트는 기로에 서 있었다. 생필품 대부분을 집에서 주문할 수 있게 되면서 오프라인 매장의 존재 이유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 온라인에서 살 수 없는 카테고리가 있었다. 바로 술이었다.
특히 와인은 흥미로운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법적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와인이라는 상품 자체가 오프라인 경험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을 맡고, 색을 보고, 맛을 음미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은 화면 너머로는 불가능했다.
롯데마트의 새로운 전략은 여기서 시작됐다.
전략의 방향성은 정해졌지만, 구체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약 200명의 일반 소비자와 와인 애호가를 대상으로 와인 설문을 진행했다.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실시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와인 구매의 걸림돌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고르기 어렵다
"정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없어서 선택이 어려워요."
전문 용어로 가득한 설명도,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도 소비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둘째, 시음하고 싶다
"마셔보지 않은 와인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어요?" 가장 근본적인 니즈였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더욱 직설적이었다. "기존 마트의 와인샵은 전문성도, 편의성도 부족하다."
셋째, 와인은 무겁다
"몇 병만 사도 들고 가는 게 제일 힘들어요."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토로한 불편함이었다. 배송 서비스나 전용 카트 같은 물리적 편의성에 대한 니즈가 높았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이런 발견이었다. 애주가들에게는 매장의 화려한 인테리어보다도 편하게 들고 가거나 배송받을 수 있는 편의성이 훨씬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
실제로 "와인을 사러 개인카트를 끌고 간다"라는 인터뷰도 있었다.
소비자 조사 결과와 마켓리서치, 전략 방향성을 바탕으로 보틀벙커의 브랜드 정체성을 정립했다.
친절한 전문성과 쿨한 재미.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담아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와인의 전문성은 유지하되, 진입장벽을 낮추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Art & Play of Wine Curation
어디서도 본적 없는 와인 큐레이션의 기술, 그리고 나만의 와인 취향을 찾아가는 즐거운 와인 탐색 여정.
수천 종의 와인을 전문적이지만 흥미롭게, 어려운 와인을 일상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틀벙커를 다른 와인샵과 다르게 하는 핵심 정체성이다.
브랜드 정체성을 바탕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구현할 공간 전략과 서비스 설계에 들어갔다. 물론 이전에부터 디자인파트너사와 함께 공간 컨셉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한정된 시간 동안 결과물을 내야 하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Hype-Warehouse를 공간 디자인 컨셉으로 정한 이유는 명확했다.
거대한 창고 같은 스케일은 압도적인 선택의 폭을 제공하면서도,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다. 프리미엄 와인을 일상의 언어로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다.
인테리어에 많은 공수를 들이기보다는, 한 끗 다르게 디자인한 철제 집기를 통해 공간을 채운다. 우리가 집중한 포인트는 공간 인테리오 디자인보다, 집기의 모듈러 구조와 조형미였다.
집기 자체가 인테리어가 될 수 있도록.
파이프의 두께, 컬러, 와인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안정성, 고객이 와인을 꺼낼 때의 편의성, 운영 시의 보관 및 이동. 이런 것까지 고려해야 해? 할 만큼 디테일에 집중했다.
무심하게 집기만 들여놓은 것 같지만, 이런 디테일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든다. 클라이언트도, 디자인 파트너도, 기획과 PM을 맡은 우리도 매일 치열하게 논의하고 빠르게 실행해 나갔다.
구체적인 서비스 설계는 소비자의 불편함을 하나씩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가격·품종·국가 중심의 기본적인(모두가 쉽게 찾을 수 있을만한) 분류 외에도, 음식 페어링이나 TPO(상황별) 같은 쉽고 재미있는 기준으로 바꾸자."
'혼술용', '홈파티용', '겨울철 대방어와 함께' 같은 상황별·음식별 큐레이션으로 접근했다. 실제로 보틀벙커에는 여기저기 페어링 음식, 계절별, 상황별 추천 와인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
서점에서 책소개를 보듯, 맛있는 와인의 세계를 탐험하러 그냥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이다. 콘텐츠 담당자분은 엄청난 고생일 테지만 이런 것 또한 소비자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요소다.
"누구나 부담 없이 와인을 맛보고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이것이 보틀벙커의 가장 큰 차별점이었다.
100여 개의 테이스팅 탭을 통해 취향에 맞는 와인을 발견할 수 있게 하고,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을 저렴한 한 잔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냈다.
비싸서 한 병을 사기엔 부담스러운 와인도, 한잔 정도는 마실 수 있잖아?
와인의 취향을 찾고, 키워가기 위해 좋은 와인을 직접 마시고 경험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페어링 경험. 간단한 안주와 함께 시음경험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러 운영상의 이슈가 있어 구현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테이스팅바가 없었다면 보틀벙커는 이 정도로 성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오프라인 공간에서만 가능한, 핵심 경험이다.
몇 미리의 와인을 제공할지, 유료결제를 어떤 방식으로 할지, 팔찌인지 카드인지, 컵은 어디다 둘지, 세척은 어떻게 할지, 시음한 와인은 어디에서 구매할지, 어떻게 찾을지, 기계에 어떤 문구를 넣을지..
이 한 존을 구현하는 데만 고민해야 하는 요소가 산더미였다. 최종 구현된 모습을 보면 그냥 그렇구나 하지만, 실제 이러한 새로운 경험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는 과정, 디테일한 수정을 거친다.
"무거운 와인을 손쉽게 사서 가져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대용량 와인 전용 카트로 자유롭게 쇼핑하고, 집까지 배송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기존의 마트에서 사용하는 카트는 너무 크고, 와인이 깨질 위험도 있다. 수천 종의 와인이 즐비해 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담으려면 와인 전용 카트는 필수적이었다.
너무 크지 않아 와인을 안정적으로 담고 돌아다닐 수 있는 사이즈의 미니 쇼핑카트를 도입했다. 그리고 몇 병 이상 구매 시 배송해 주는 서비스까지. 결국 사업의 성패는 한 명의 소비자가 장바구니에 얼마를 담느냐에 달렸다. 단순히 많이 사세요! 가 아니라 많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보틀벙커는 그렇게 단순히 와인을 '사는 곳'이 아니라 와인을 '즐기는 곳'으로 완성됐다.
매장을 찾은 고객들의 행동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카트에 와인을 담아 자유롭게 둘러보고, 테이스팅 존에서 새로운 와인을 시도하며, 페어링 제안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여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무엇보다 와인이 더 이상 어렵고 무거운 술이 아니었다. 보틀벙커에서 만큼 음 일상에서 쉽게 어떤 음식과도 먹을 수 있는, 소주를 대체하는 술이 되었다. 2021년 12월 첫 개장한 잠실점 이래로 보틀벙커는 지금까지도 와인샵의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당연한 것을 제대로 구현하는 힘
보틀벙커의 사례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명확하다.
게임체인저는 거창한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비자의 작은 불편함— 어렵다, 맛을 알 수 없다, 무겁다—을 하나씩 풀어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탄생한다.
약 200명의 설문과 심층 인터뷰, 전문가의 의견, 마켓 리서치.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발견한 것은 결국 당연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제대로 구현한 곳은 없었다.
지금 보틀벙커는 와인업계의 게임체인저로 불린다. 롯데마트의 명확한 사업전략과 기막힌 타이밍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꼽힌다. 하지만 전략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면 결국 소비자에 외면받는다.
전략을 실행으로 연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차근차근 설계한 것.
브랜드는 그렇게, 과정 위에서 완성된다.
PINCH. Director S
Director S는 냉정한 분석과 섬세한 감각으로 변화의 흐름 속 기회를 포착하고,
아이디어를 실행력 있는 전략으로 체계화하는 로드맵 메이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