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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Aug 22. 2019

그리움은 빗물 되어 흐르고

2013년 교보문고 손주사랑

비 내리는 7월의 밤입니다. 삼라만상이 고요히 잠든 이 깊은 밤, 빗방울만 창밖을 두드리네요. 이렇게 비 오는 밤이면 문득문득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곤 하죠. 아마도 그리움은 빗방울인가 봅니다.


서울의 밤, 저는 이렇게 할머니에게 마음 속 이야기를 건넵니다. 아마 하늘에서 할머니는 제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계실겁니다. 저의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이맘 때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가 돌아 가신 때로부터 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제가 11살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저를 반겨주십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 …


제 고향은 한반도 북단 함경북도의 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저는 중국이 건너다 보이는 두만강가의 한 시골집에서 태어났죠. 당시 아버지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북한에서는 군복무가 10년이다보니 대학생 아빠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1남 5녀의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2대 독자셨죠. 그렇게 아들이 귀한 집안에 제가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두벌 자식이 더 예쁘다’고 손주를 사랑하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주사랑은 유별났습니다. 더구나 2대 독자 집안의 장남이니 더 하셨겠죠.


철이 들 무렵 들은 이야기지만 할머니는 저를 잠시도 방바닥에 내려 놓지 않고 계속 업어 키우다시피 하셨답니다. 고모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가 사랑과 정성을 다하셨답니다. 할머니는 고모들이 직장과 학교에 나간 낮시간이면 저를 업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셨답니다. 손주자랑을 하러 다니신거죠. 만나는 동네어른들이며 아낙들에게 저를 보여 주시고 그분들이 하는 칭찬에 흐뭇한 맘을 금치 못하셨다죠. 저녁이 되어 고모들이 돌아오면 할머니는 번갈아 저를 돌보게 하셨답니다. 


어머니가 저를 안아볼 새 없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할머니의 극진한 손주사랑 덕분에 어머니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에, 첫 아이 키우는 “고달픔”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고 하시네요. 아버지는 멀리에서 대학 기숙사생활을 하고 계셨거든요. 할머니는 제가 감기라도 든 날이면 꼬박 밤을 새워가시며 제 머리맡을 지키셨답니다. 할머니는 제가 모유수유를 마치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을 때는 계란이며 명태, 사탕, 과자 등 당시 그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구하셔서 제 밥상과 간식을 챙기겼습니다. 직접 엿도 달이셔서 겨우내 창고안에 보관하시면서 저에게 먹이셨습니다. 할머니는 철 따라 새 옷도 제일 먼저 사입히셨습니다. 할머니의 손주사랑 덕분에 저는 당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4살 되던 해,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신 아버지가 고향집과는 멀리 떨어진 평양 교외의 기관에 배치 받으셨습니다. 북한에서는 취직을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기관에서 직장에 배치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갓 2살 된 제 누이동생은 아버지를 따라 먼 평양교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새로운 고장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걱정되셔서 저를 떨구어 두게 하셨습니다. 


물론 태어나서부터 안아 키운 2대 독자, 장손과 떨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더 크셨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1년 정도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엄청 찾았답니다. 그러나 제겐 어머니 사랑 못지 않은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계셨죠. 할머니는 말도 잘 하고 고모들에게서 한글과 영어단어도 깨치는 저를 곁에서 사랑어린 눈으로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셨죠. 지금도 저를 지켜보시던 할머니의 그 자애로운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형들과 놀 때면 동네는 물론 두만강까지 따라나오셔서 저를 지켜보곤 하셨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이렇게 넘치는 할머니의 사랑과 함께 흘렀습니다.


다섯살 되던 해, 저는 할머니 곁을 떠나 부모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멀리 동구밖까지 따라 나와 연신 눈물을 훔치시며 손저어 저를 바래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과 함께 자라면서 유치원에도 가고 학교에도 입학했습니다. 할머니와 정이 들었던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몇달에 한 번씩은 꼭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드렸습니다. 그 편지들을 할머니는 고이 간직하고 제가 보고 싶을 때면 제 사진과 함께 꺼내보곤 하셨답니다. 제 고향은 너무도 멀고 여행하기 불편한 북한 사정 상 그후 저는 고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등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제 밑으로는 동생들이 3명이나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막내 고모에게서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할머니가 위암에 걸리셨다는 전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고향으로 가셔서 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암이라면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할머니는 위암말기였습니다. 할머니의 야윈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6년만에 장손을 보는 것이 그렇게 좋으신지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저희 집에 오셔서도 할머니의 병세는 나날이 악화됐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학교 다녀와서 할머니 침상옆에 앉아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위암이다보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셔서 점점 더 야위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하나라도 더 맛있는 음식과 간식을 챙겨드리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간식을 드시지 않고 머리맡에 감추어 두셨다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00아. 어서 와라”하고  저를 불러 주곤 하셨습니다. 


동생들도 있었지만 정이 든 장손에게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불꽃 같은 사랑을 깡그리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1년 간의 투병생활 끝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임종의 마지막 순간 저를 보시며 “00아. 아버지 어머니 말씀 잘 듣고 꼭 집안을 떠메고 나가는 기둥이 돼야 한다”하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때로부터 2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학창시절 학생초급간부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졸업할 무렵 집단탄원바람이 불면서 저희 학급은 모두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병사와 군관을 거쳐 12년만에 저는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서울시민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은 밝고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학교생활과 군생활을 반듯하게 열심히 했고 따뜻하고 밝은 마음으로 바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미래와 희망이 없는 그 땅을 떠나 한국행을 결심 했을 때, 저는 할머니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해마다 할머니 산소를 찾아 벌초도 해드리고 인사도 드렸는데 기약 없는 길을 떠나자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할머니에게 큰 절을 드리면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렸죠. “할머니.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해 주셨던 이 장손, 먼 길을 떠납니다. 할머니. 제가 가는 길 무사히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부디 굽어 살펴봐주세요. 통일이 되는 날 다시 돌아와 꼭 할머니를 찾아 뵐게요.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 산소가 있는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1만 km가 넘는 먼 여정을 돌아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할머니가 제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다행히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한국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7년, 저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방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경제발전과 생활개선, 의료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평균기대수명이 81세, 특히 여성분들은 84세의 평균수명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70, 80대 어르신들이 다정하게 산책도 하시고 건강하게 사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할머니 생각에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할머니는 갓 60을 넘기신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의료과학이 발달해서 암이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닌데 할머니도 이 한국땅에 계셨으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제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군 복무를 할 때나 홀홀단신으로 이 한국땅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내 삶의 매 순간순간마다에는 할머니의 극진한 손주사랑과 그 사랑이 준 용기,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후회없는 바른 인생, 미약하지만 통일을 위한 자그마한 불씨가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 내리는 이 밤 따라 할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할머니가 보고싶어 집니다. 차로 달리면 한나절 거리에 할머니가 잠들어 계시지만 가고파도 못가는 그 땅입니다. 10월이면 저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외로운 제 인생길에 함께 할 반려자를 만나 사랑의 언약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할머니도 이 사실을 아시면 아마 기뻐하실 겁니다. 신부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가고 싶지만 그 길은 언제 열릴지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할머니 뵈러 가야겠죠.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 할머니 앞에, 할머니 사랑앞에 부끄럽지 않은 손주가 되기 위해 생의 열정을 불태우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할머니 만나러 가는 그 길이 하루라도 앞당겨 질 수 있게 통일을 향한 발걸음 멈추지 말아야 겠습니다. 할머니. 그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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