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옹 Aug 02. 2018

모리타니아 가는 길

모리타니아 국경을 넘는 50시간의 여정


여행을 하다보면 한국에 있을 때와 시간 개념이 달라진다. 이동하는데 5시간이면 꽤 가까운 것이고 10시간이면 갈 만한 거리, 20시간이면 조금 멀다고 느껴진다. 30시간 이상 정도가 되어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의 국경 도시인 다클라에 도착했을 때는 장시간 이동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라바트에서 라윤까지 20시간, 라윤에서 다클라까지 또 10시간을 달려왔다. 라윤에서 하룻밤 묵긴 했지만 자는 곳이 워낙 불편했기에 30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기분이었다. 나는 당장 어딘가에 드러눕고 싶은 심정으로 옷깃을 여미며 버스에서 내렸다.



“누악쇼트? 누아디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이든 남자 한 명이 대뜸 말을 걸었다. 모리타니아의 대표적인 두 도시 이름을 질문처럼 던진 그는 국경 도시에 내리는 외국인의 목적이야 뻔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누악쇼트라고 대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남자와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이런 젠장. 이 도시에서 하루 묵어가긴 글렀군.


남자는 차가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옆의 까페에라도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누악쇼트까지는 또 다시 10시간 넘게 차를 타야한다. 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민트티를 주문했다. 생 스피아민트 잎을 잔뜩 넣고 끓인 후 설탕을 쏟아부은 모로코식 민트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모로코식 주전자에 가득 담긴 민트티와 유리잔이 내 앞에 놓였다.


모로코식 주전자에 담긴 민트티


쓰디쓰고 달디단 민트티를 홀짝 거리며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았다. 시커멓게 암전되었던 풍경이 어느새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슬슬 해가 뜨려는 모양이다. 수평선의 반대편에는 사막을 따라 지평선이 길게 떨어져 있겠지. 수평선으로 뜨는 해와 지평선으로 지는 해를 매일 바라 볼 다클라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다클라에 하루 머물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새삼 아쉬워졌다.


30시간 동안 차 안에 갇혀 있으면 시간의 변화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민트티를 다 마셔갈 때쯤 기사가 나를 불렀다. 이제 출발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남은 민트티를 한입에 털어넣고 그를 따라나섰다. 

 



사막 한가운데의 공터에는 수십대의 택시가 주차되어 있었다. 사방이 지평선이니 공터랄 것도 없지만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경계선이 있는 건지 나름 질서정연하다. 택시 뒷자리에 합승한 두 승객의 몸집이 집채만해서 나는 0.5인분쯤 되는 자리에 구겨지듯 앉아야 했다. 잠시 후 해가 완전히 밝아오자 택시가 지평선을 향해 출발했다.


여행을 하며 생긴 습관 중 하나는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는 것이었다. 나는 불편한 와중에도 나름 자세를 잡고 깨무룩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잠시 잠깐 깰 때 마다 창밖으로 바라다보이는 풍경에는 변화가 없다. 끝없는 지평선. 끝없는 모래. 우리는 사막을 달리고 있었다.


이런 황량한 땅이 몇백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다


바뀌지 않는 풍경은 1분 간격으로 반복 재생되는 고장난 필름을 영사기에 끼워놓은 것 같았다. 그 1분이 수백번 반복되는데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이 이토록 넓었던가. 이 땅 위의 나는 한 톨 먼지 따위 밖에 안 되는 존재겠지. 




국경에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내 비자를 검사하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 땅에서 솟은 듯 뜬금없이 서있는 출입국 사무소를 지나쳐 우리는 다시 반복되는 풍경 속으로 출발했다.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까지가 사막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길 위를 얼마나 달렸을까. 단조롭던 풍경에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났다. 갈림길에는 너무 투박해서 헛웃음이 나오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북쪽으로는 누아디부, 남쪽으로는 누악쇼트를 가리키는 이정표였다.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극단적인 이정표를 보니 선택의 기로에 선 기분이었다


택시 기사는 갈림길 위에 차를 세우고 나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드문드문한 영어와 프랑스어가 섞인 그의 말을 듣자하니, 나를 제외한 다른 승객들은 모두 누아디부로 가는지라 나를 태울 누악쇼트행 차를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전 누아디부 근방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지라 섣불리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햇빛을 가려줄 그늘조차 없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뚝 떨어진 우리들은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간혹 들리는 바람 소리와 춤추는 모래 먼지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몇시간동안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 고요한 갈림길에 앉아 있자니 마치 우리들이 아포칼립스 이후 최후의 5인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서러워졌다. 차를 타고 달리는 며칠 내도록 꼭 필요한 말 외에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무심하게 앉아 익숙하다는 듯 차를 기다리는 저 사람들과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다. 만약 이대로 세상이 끝나는 게 맞다면, 나는 평생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막을 떠돌게 되겠지.


갈림길, 누아디부 방향의 도로 풍경


서러움이 커져 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쯤 지평선 저 멀리서 미니버스 한 대가 나타났다. 버스가 멈춰서자 택시 기사는 버스 기사와 몇마디를 나누더니 나를 차에 태웠다. 나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짐짝처럼 그 버스로 인계되었다. 




적어도 누악쇼트행 차를 탔다는 데서 안심이 됐다. 나는 버스 가장 뒤쪽의 불편한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시간동안 계속 지나쳐오던 풍경이지만 눈을 떼기가 힘들다. 멍하니 앉아 있는 중에 버스는 자주 멈춰섰다. 게릴라가 종종 출몰하는 지역이라 군인들이 차를 세워 검문하는 일이 잦았다.


검문이 있으면 모두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이 날 여권을 열 번도 넘게 꺼냈던 것 같다


이제야 검문이 사라졌나 싶을 때쯤 버스가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버스 안의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는 여자들과 함께 버스 안에 남아 불안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들은 잠시 후 사막에 꿇어 앉았다.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교리에는 하루 다섯번 기도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국민의 대부분이 신실한 무슬림인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에서는 버스 기사마저도 기도 시간을 빼먹고 달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태어난 곳은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은 한 곳이다


남자들은 연신 손을 들었다가 절을 하며 꽤 오랫동안 기도했다. 고된 여정 중에도 기도하기 위에 굳이 멈추는 그들의 모습이 사뭇 성스러워 보였다. 저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메카가 있겠지.

 



어느 새 해가 졌다. 암흑이 뒤덮은 세계에서도 버스는 검문을 받기 위해 주춤주춤 멈추었다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밤이 깊은 시각이 되어서야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누악쇼트였다. 3박 4일을 이어온 내 길 위의 시간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다.


드문드문 주택이 나타나며 도시가 시작될 때 즈음, 나는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10시간 넘게 내 시야를 차지하던 사막 위의 길은 이제 시커멓게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문득 그렇게도 지긋지긋했던 반복적인 풍경이 그리워졌다.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던 길 양쪽의 황폐한 사막, 드넓은 하늘 아래 단 하나의 움직이는 존재였던 낡은 택시, 끝없이 넓은 세계를 바깥에 두고 비좁게 끼어 앉아 대자연 위를 무심히 달리는 우리들. 그 모든 상황이 말도 안 되게 웃기지만 미묘하게 현실적인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아 불현듯 웃음이 나왔다.


버스가 완전히 시내로 들어섰다. 50시간 가까이 걸린 누악쇼트로의 여정에 마침표가 찍혔다. 나는 대자연에 대한 향수 따위는 금새 잊은 채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실 생각으로 행복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