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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lephant Dec 15. 2015

묵혀둔 편지는 가슴 깊이 묻었다.

첫 번째 빈자리의 이야기


깊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네 시선이었음을.
너는 한 사람의 깊이를 깊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마음 한 가닥 쿵, 하고 깊이 가라앉도록
요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따듯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미 스쳐간 네 품이었음을,
나는, 아니 우리는 누구나 다, 몰랐다.

너를 말할 때의 나는 장미향 보다 깊은 내음을 느끼고
너를 그리워하는 나의 목에는 가시가 돋는다
나는 한 송이 꽃처럼 이 한 순간을 지내고 있음을
낙엽이 떨어지는 이 계절을
너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고,
멀리 떨어져 있는 너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에
한 줄 두 줄 가지런히 적는다.

<묵혀둔 편지는 가슴 깊이 묻었다>, PINELEPHANT



 1. 우리는 누군가 옆을 떠나고 난 후에야  빈자리를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빈자리의 이야기, 즉 그리움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면 좋을까.


오십 미터, 허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전두엽은 너를 복원해낸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 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무슨 수로 그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지만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인형 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날들을 소년으로 살아간다.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그리움을 잊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모두 어른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소년이었고 앞으로도 자주 소년일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시간에서 그리움의 시간들을 말할 때 소년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자주 우리의 시간 어딘가에, 혹은 마음 한 구석에 그리움이란 감정을 들고 서있는 소년을 사랑한다.


 나는 그리움에 대해 음미하고 싶었다. 허연의 시는 그리움의 그림자가 짙다. 그래서 나는 그리움을 얘기하고 싶을 때 종종 허연의 시들을 찾아본다. ‘오십 미터’의 이야기 속 소년은 어떤 그리움을 가지고 있을까. 오늘은 이 시의 그리움의 소년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인은 말한다.

 ‘무슨 수로 그 그리움을 털겠는가’. ‘오십 미터’의 소년은 털어 내려야 털어 낼 수 없는 그리움을 갖고 있다.  마음에 지병 같은 그리움을 시인은 오십 미터, 성인 걸음으로 채 오십 걸음 조차 안 되는 거리를, 그 걸음을 걷는 시간 동안 다시 또 질리도록 신경 쓰이는 아픔 같은 것이 마음에 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때와 그 장소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만 우리를 아파하고 슬퍼했던 소년의 시간으로 이끌어가 붙잡아 두는 그리움이란 그리 많지 않다. 이를테면 사랑했던, 행복했던과 같은 과거에 머물러 버린 시간들이 그렇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들이 병 같은 아픔으로 마음 한 편에 자리한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일생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대’의 일생이 오는 동안 우리 무는 의 뇌는 암묵적으로 필터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모든 감각은 필터를 거처 뇌에 흘러든다.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 모든 감각들이 ‘그대’라는 필터를 거처 뇌를 지나 중추신경을 타고 마음으로 흘러든다. 그대라는 대상이 명확이 느껴질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다. 또 그대라는 대상이 떠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허무감이라 부를 것이다. 허무는 우리를 불행하다고 믿게 만들며 행복했다는 사실 조차 ‘소년’의 슬픔으로 덮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고 허약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빈자리의 그리움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는 무책임을 가지고 말하고 싶다. 무엇을 말해도 좋다. 그리움이란 대체로 지나가는 시간 위에서 벗어난 것이고  순환되는 시간 속에서 점차 이탈해 나갈 것이니 말이다. 불운 속에서 그대가 미치도록 환해도, 그 큰 그리움이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우리는 무엇을 말하든 옳다. 행복을 불러와 행복한 시절을 기억해도 좋다.  ‘정지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하며 눈물 두어 방울 뚝뚝 흘린대도, 오늘은 그냥 무슨 주책없지 싶다며 남들이 보기 전에 훔치고 다시 ‘오십 미터’를 걸어가도 좋다. 그것은 이미 비워지는 대상일 뿐이며 슬픔으로, 고통으로  온몸으로 게워내고 있는 시간들이기에. 시간이 더 흐른다면 그 자리에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다시 자리 잡을 것이 뻔하니까.



 


2. 행복이란 우리의 그리움에 대한 지표가 된다. 그 시절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때의 행복이란 미화되어지고 아득한 것이 된다. 마치 무지개 같다.


 3.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운 때가 있고, 그리운 계절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나는 행복한 시절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4. 시절은 지나가는 시간 위에 있고 계절은 반복되는 시간 위에 있다. 계절이란 어쩌면 우리가 다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동안의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글들은 허구이다.
이곳에 쓰인 단어는 허구이다.
문장 사이에 공백의 쉼은 허상이며 모든 단어는 가볍고 가파르게 쓰인 것이다.
이 글들은 나의  꿈같은 세계에 기인하고, 꿈은 기억에서 언제든 사라질 것이기에 꿈을 붙잡아 놓은 이 글들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쓰기를 원한다.
내  손마디를 떠난 글은 언제든 사라질 것이기에.

2015. 1. 28




인스타그램 @pin_elephant

Nikon D200 | Sony A7 | Rollei35 | 서정적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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