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파와 한 잔의 사색

by 비움과 채움

위스키를 사랑한다 못해 수집까지 해버린 내 친구는

새로운 병을 꺼낼 때마다 마치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이야기 하나를 붙여 세상에 내놓는다.

여행을 가면 관광지도, 맛집도 뒤로하고 오직 위스키 숍의 문을 밀어젖히며

진귀한 술 한 병에 세계의 시간을 담아 들고 오는 녀석이다

그런 그를 ‘위스키 박사’라 부르는 건 어쩐지 과장이 아니다.


어제 녀석의 초대에 달려갔다

나는 그의 출장 한편에 서있는 올드 파 1리터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올드 파 위스키엦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토머스 파

살아생전 152년을 버텨낸 영국의 장수 노인.

80세에 첫 결혼을 하고, 122세에 상처한 뒤 재혼을 하고,

105세엔 마을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캐더린과 사랑을 나눠 아이까지 보았다는 기막힌 인물.

그의 긴 세월 속에는 조용한 시골의 맑은 공기, 이른 새벽의 촉촉한 안개,

소박한 식탁과 천천히 흘러가는 일상이 켜켜이 쌓여 있었을 듯.


장수의 비밀이 궁금했던 국왕 찰스 1세는

그를 금과 은으로 수놓은 마차를 보내 런던으로 초대한다.

웃음과 환호를 받으며 도시로 들어가는 그 모습은 마치 알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만약 토머스 파가 왕실에 가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도시의 기름진 음식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호사스러운 식탁

갑자기 바뀐 환경에 대한 부담감

그의 긴 세월을 지탱해 주던 규칙적인 걸음과 소박한 식습관이 왕궁의 화려한 공간 아래서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의 몸은 평생 가꿔 왔던 생활의 리듬을 잃었을 테고,

왕의 만찬이 주는 영광 뒤에서

그의 건강은 조용히 스러져 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문 지 몇 달 만에 급사했다.

궁중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파의 초상화는 지금도 위스키 ‘올드 파’의 라벨이 되어 남아 그를 기리고 있다고.


이 녀석이 풀어내는 파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손에 든 술병이 단순한 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을 오롯이 담은 유리병 같았다.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찌 이 술을 아니 마실 수 있으리오.”


내가 장난 삼아 술병을 따려 하자, 순간 녀석은 정색을 한다.


“잠깐! 그건 영국에서 간신히 구해온 올드 파 슈페리어 18년이야. 내가 아끼는 소장품이야."


장난기가 발동하여 다른 술은 안 마시겠다고 억지를 부리자 녀석은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짓는다.

결국 녀석은 ‘족보 있는’ 위스키를 땄고

우리는 고급술을 한 모금씩 돌려 마시며

토머스 파의 생을 따라 천천히 취해갔다.


어젯

집으로 귀갓길에 다리가 휘청거려 지그재그로 걸었지만

왠지 마음은 무지 따뜻했다.

한 사람의 삶을 담은 술,

그리고 그 술에 이야기를 입혀 들려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내겐 작은 축복이 아닐까 싶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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