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柿) 좋다

by 비움과 채움

퇴근길, 현관 앞에 놓인 박스 하나가 시선을 붙잡았다.

보낸 이를 보니 전라도 영암으로 귀농한 친구 녀석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늘 죽겠다'는 소리 선수인 그놈답지 않게 한껏 여유가 넘쳤다.

“올해 감 농사가 잘 되어 주머니 두둑해졌어.”

풍년이라는 단어보다

그 말 끝에 실린 넉넉함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주머니가 두둑해졌다는 말에 내가 더 흐뭇해지는 건 아마도 오래된 친구 사이에 흐르는 정 때문이리라.


박스를 열고 신문지를 펼쳐 깔았다

대봉을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레 세웠다

팽이를 닮은 그 풍만한 곡선,

빨갛게 물든 빛깔,

방안을 온통 차지한 들큼한 감향

'대봉'

감 중에서도 ‘왕’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님이 느껴졌다

햇살이 실 것 머물다 간 듯 반들반들 윤기가 번져 바라보고만 있어도 대봉 닮은 미소가 번진다.


말랑한 녀석 하나를 골라 툭 베어 물었다

떫은맛이 입안 가득 번지고

곧이어 단맛이 부드럽게 스며드니

묘한 균형을 어우러진다.

대봉 특유의 깊은 향이 혀끝에서 천천히 퍼져

늦가을 쓰다 말고 덮어 뒀던 글 한 줄이 완성된듯하다.


생각이 슬슬 많아졌다.

이 대봉을 깎아 꿰어 곶감으로 말려볼까?

대봉 곶감은 단맛이 더 깊고 식감은 찰져진다던데.

아니면 그대로 두어

스스로 농익은 홍시가 될 때까지 기다릴까?

갑자기 ‘감 부자’가 되어버린 나는

행복한 고민 속을 오락가락했다.


어찌 되었든,

오늘 집 안에 감 향기가 가득 번지고

눈까지 푸짐하게 호강하는 건

오롯이 친구 덕이다.


친구야, 고맙다.

오늘 이런 달콤한 고민을 하게 만든 건

바로 너

바로 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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