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에서

by 비움과 채움

친구들과 이른 송년회를 가졌다.

작년 송년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또 송년회라니.

한 해가 하루처럼 흘러갔다는 말이 이럴 때 실감 난다.


모처럼 모인 자리였지만, 화제는 자연스럽게 건강으로 모였다.

예전 같았으면 여행이나 돈, 혹은 누가 잘 나가고 못 나가는 이야기가 중심이었을 텐데,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얼마나 오래, 그리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가 가장 현실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영영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친구가 벌써 두 명이나 생겼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건강 이야기가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띤 주제는 ‘건망증’이었다.

너도나도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소설 한 편씩은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차 키를 냉장고에 넣어둔 이야기, 방금 하려던 말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던 이야기, 전화기를 찾느라 전화기를 들고 헤매던 이야기까지.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 웃음 끝에는 늘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이거… 설마 치매는 아니겠지?”


누군가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건망증은 일시적으로 기억이 흐려지거나 떠올리는 속도가 느려지는 현상으로, 중요한 사실 자체를 잊기보다는 세부적인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많고, 힌트를 받으면 다시 기억해 내며, 무엇보다 스스로 이상을 인지한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는 설명에 모두가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치매’로 넘어갔다.

지인 중에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박식한 친구가 말을 이었다.

치매는 단순한 기억력 저하가 아니라 판단력, 언어 능력, 공간 인식 등 여러 인지 기능이 함께 떨어져 혼자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는 임상 증후군이며,

결국에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그 누구도 남의 이야기로 넘길 수 없는 질병이라고 했다.

“걸리지 말아야 할 병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할 병”이라는 말에, 괜히 술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치매 예방 이야기가 나왔다.

‘3금’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술은 줄이고, 담배는 끊고, 스트레스는 받지 말 것.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웃음이 터졌다.


“넌 술 좋아하니까 1순위다.”

“넌 담배 못 끊으니 네가 먼저다.”

“넌 돈 번다고 맨날 머리 쓰잖아, 제일 위험해.”


서로를 향한 농담과 악담이 오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상하게도 정이 배어 있었다.

걱정이 있으니 놀릴 수 있는 것이고, 오래 함께하고 싶으니 이런 말도 나오는 것일 테다.


송년회가 끝날 즈음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그득했고,

틈만 나면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주식 매도·매수 타이밍을 놓칠까 봐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말 건강 이야기를 한 게 맞을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다만,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모여

불안과 두려움을 웃음으로 덮어두는 방식으로

각자의 건강을 걱정했을 뿐이다.


기억이 흐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잃게 되는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오늘의 술잔과 담배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이른 송년회에 모인

우리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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