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과 기다림 사이에서

by 비움과 채움


오늘 신문 한 귀퉁이에서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는 사자성어를 만났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결국 돌을 뚫는다는 뜻.

익숙한 말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마음을 건드렸다.

단어가 아니라,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 하나를 함께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회사를 다니던 때였다.

유명한 철학 교수를 초청한 강연회에서 나는 수적천석이라는 주제를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했다.

빨리 인정받고, 빨리 올라서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속이 늘 끓던 젊음이 불타던 시절이었다.

노 교수는 “물방울은 조급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루에 몇 번 떨어지는지, 언제 구멍이 나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자기 몫의 시간을 반복할 뿐이라고.


강의가 끝날 무렵, 노교수는 칠판에 큰 글씨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적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흔들렸다.

위로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답답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나는 언제쯤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수적천석과 대기만성.

둘 다 옳은 말이지만, 그 사이에는 현실이 끼어 있었다.

월급날은 매달 돌아왔고, 성과는 매번 요구되었으며, 인생은 기다려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 나는 두 사자성어를 사이에 두고 오래 갈등하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그 말을 떠올려보니 조금 다르게 보인다.

수적천석은 방법에 가깝고, 대기만성은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방울은 빠르지 않지만 멈추지 않고,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되지만 그만큼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문제는 우리가 이 말을 너무 쉽게 표어로만 소비한다는 데 있다.

실천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매일 한 방울씩 떨어지는 삶은 눈에 띄지 않고,

기다림은 언제나 불안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간에 방향을 바꾸고, 물줄기를 바꾸고, 아예 다른 돌을 찾는다.


그러나 돌이 뚫리는 순간은 늘 조용하다.

박수도, 예고도 없다.

어느 날 문득 “아,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알게 될 뿐이다.


잘 산다는 것은,

남들보다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도를 배반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흔들리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조급해지더라도 멈추지는 않는 삶.


수적천석과 대기만성은 서로 싸우는 말이 아니다.

하나는 오늘의 자세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내일을 견디는 힘을 말한다.


나는 아직도 그 사이 어딘가를 걷고 있다.

다만 예전보다 덜 불안해졌을 뿐이다.

오늘도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며,

언젠가는 돌이 뚫리고야 말 거라는

그날을 믿어보고 기다리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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