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雨水)

by 비움과 채움

겨울은 늘 끝이 없을 것처럼 깊어집니다.

눈은 쌓이고, 바람은 매섭고, 숨을 들이켤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파고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혹독한 추위라도 계절의 순환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겠지요.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도 우수 경칩을 지나면 스르르 물길을 되찾는다는 말. 이는 단순히 강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얼어 있던 마음도, 굳어 있던 생각도, 닫혀 있던 시간도 결국은 풀린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반드시 온다는 선언 같은 말입니다.


겨울을 지나며 우리는 종종 멈춰 섭니다.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고, 관계는 얼어붙고, 마음은 자꾸만 움츠러듭니다. 그럴 때면 세상이 영영 차가운 계절에 머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속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얼음 아래에서는 이미 물이 흐르고, 나뭇가지 끝에서는 보이지 않는 싹이 준비를 마칩니다.


“우수 뒤의 얼음같이.”


이 말은 얼음이 슬슬 녹아 없어지는 모습을 빗댄 표현입니다. 단단해 보이던 것도 때가 되면 풀리고, 굳어 보이던 문제도 결국은 흐르게 됩니다. 우리가 꼭 쥐고 있던 걱정도, 마음속 깊이 묻어둔 상처도, 계절이 바뀌듯 조금씩 옅어질 수 있습니다. 억지로 깨뜨리지 않아도 됩니다. 햇살이 스미면 저절로 녹아내리듯, 시간과 온기가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봄은 늘 순탄하게 오지만은 않습니다.


“꽃샘잎샘에 반늙은이 얼어 죽는다.”


우수 무렵 찾아오는 꽃샘추위는 봄을 시샘하듯 마지막 힘을 다해 몰아칩니다. 따뜻해졌다고 방심하면 다시 한기가 스며듭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조금 풀렸다고 생각할 때 뜻밖의 차가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단단해져야 합니다. 봄을 믿되, 마지막 찬바람을 견딜 준비도 해야 합니다.


겨울을 끝낸다는 것은 단순히 추위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난 계절의 나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얼어붙었던 기억을 풀어주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스스로를 다시 햇빛 쪽으로 돌려세우는 일입니다.


봄을 준비하는 마음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창문을 조금 더 오래 열어두는 일, 두꺼운 코트를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잘 견뎠다”라고 말해주는 일, 새로운 씨앗을 하나 심어 보는 일. 그 작은 움직임들이 곧 봄의 시작입니다.


우수와 경칩은 달력 위의 절기이지만, 우리 마음속에도 절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풀릴 강물처럼, 우리 안에도 흐르려는 생명이 있습니다.


겨울을 충분히 지나온 사람만이 봄을 깊이 맞이합니다.

이제 우리는 얼음을 부수는 사람이 아니라, 녹아 흐르는 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조용히,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봄은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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