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명작, 특히 베스트셀러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이거 저거 읽다 보니(라고 말하지만 개강하고 한 권도 못 읽고 있는 중입니다.. 만학도의 삶....)
사람도 그렇지만 책마저도 실은 시간 앞에 장사 없는 법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경험 상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작품의 결론은 아래와 같은 두 유형으로 나뉘곤 해요. (논문 서두 st.)
가장 많은 경우인데,
시간의 힘으로 전에는 읽어내지 못했던 것들을 깊게 이해해서 풍부한 울림을 새롭게 얻게 되는 경우죠.
또 하나는 당시의 압도감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느낌을 주는 경우입니다.
특히 후자의 책들에 대해 할 말이 많아요.
분명 사람을 잠 못 자게 했던 작품이었는데, 지나고 나면 별 게 아닐 때의 씁쓸함 겪어보신 적 있나요?
그렇게나 강렬하여 영혼을 후려치는 힘이 있었는데!! 넘치는 박력에 뒤통수가 얼얼했는데!!
그렇게 물고 빨고 핥고 좋아했는데!! 사랑(?)했는데!! 나랑 백년해로를 약속했는데!!(오타쿠)
근데 그런 작품이 별 게 아니면.
마치라잌 이제는 빛바랜 그 시절 나의 아이돌 오빠를 보는 것 같고 그래요.
그렇지만,
이런 책들은 사실 작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독자의 세월을 못 이긴 거라서.
그시절나의오빠들이노화에맥을못추는것처..러...ㅁ..
작가의 문제도, 작품의 문제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핑계를 적절히 깔아보고,
오늘은 '저만 별로였던 책'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을 소개하려 해요.
다시 말하지만 (변명 재도포)
읽는 이의 세계를 뒤흔들만한 역량을 갖춘 작품도 따지고 보면
독자의 인생그래프 굴곡을 잘 타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
작품의 매력이 최대한 발휘되며 읽는 이에게 제대로 꽂히게 되는 거구요.
그러므로(변명3차도포) 제가 지금 별로라고 하는 책들은,
"작금"의 제가
인생을 요만큼만 지나 본 "현시점"(동어반복)의 제가
1)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 별로이거나 2) 혹은 빛바랜 그 오빠들과 같은 후자이거나
한 책들입니다.
말인즉슨,
작품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 (변명 4차도포)
이제 적당히 깔았으니,
첫 번째 소신발언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데미안입니다.
............................................................머쓱..............
데미안을 인생 책으로 갖고 계신 분들 많을 텐데.
혹 데미안 덕후분이 계신다면 위에 도포된 변명(총4차례실시됨)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고 들숨 날숨에 최애가 폄훼당한 분노를 날려 보내는 걸로.
일단 이 책의 추천 연령을 정해드리겠습니다. 이건 적확히 20대입니다. 방황하는 청춘의 한 시점을 지나고 있는 딱 그즈음이 좋습니다. 제가 보기에 십 대는 아직 가 닿기 어렵구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보송하고 발그레한 뺨을 가진 새내기가 쌀쌀한 겨울과 봄의 언덕 그즈음을 지나서
대학 붙고 도파민 폭ㅋ발ㅋ하는 시절도 끝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설레던 만남도 시들해질 무렵.
현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그 무렵. 덧붙여 이성과의 로맨스도 조져지고 학점도 함께 조져지고 (전공이 본인과 안 맞으면 더 좋음) 그닥 희망차지 못한 현실이 그려지는 그 시점이 최고입니다. 성취와 야망의 시절은 지났지만 아직 보듬어 줘야 하는 자아는 말캉한, 고 시점.
뭐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난 것 하나 없는 현실을 지나칠 것 하나 없이 알고 있지만.
그런 건 속으로만 묻어두고
그럼에도 잘 나고 싶은 사랑스럽고 귀중한 스스로의 방황이 못 견디게 슬플 무렵.
딱 그쯤.
이 책은 딱 그때의
서글픈 영혼의 20대에게 찰떡같이 붙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더하여 이건 제 젊은 날의 자기소개이구요.
(그러니 누군가를 까내리는 건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하는 말 정도...)
심지어 그때 읽었던 데미안은 임용고시를 2주 남긴 교육학 개론서만큼이나 밑줄 밑줄 밑줄.....
그래서 하고싶은 말은 뭐냐 하면
이제는 20대가 언감생심 잡히지도 않는,
늙수그레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젊다고 말하기 어려워진 작금의 제 처지에서
데미안이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근래 다시 읽어 본 녀석(데미안)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약간.. 쥐어박아주고 싶다고 해야...하..ㄹ...
고전명작을 까려니 호흡이 딸리네요. 흐읍흐읍.
용기를 갖고.
다시 한번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주인공인 싱클레어, 데미안까지)은 정말이지 더 봐줄 수 없는 중2병 말기 환자였습니다.
.... 이건 작가문제입니다. 무려 그 대작가 헤세를 '문제'라고 평하는 게 마땅한가 싶지만.
헤세의 문제가 맞아요. 헤세 탓입니다. 너무너무 별로라서 할 말이 없었어요.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던 지점은 여기입니다.
걔(=싱클레어)가 자꾸 '완성된 나'의 길로 이르고 싶어 하는 곳이요. 걔는 진짜 자아의 길로 이르고 싶어 해요.
'진짜 자아'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이러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헤세가 이 지점을 풀어내는 방식이 굉장한 용두사미.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수준이라서.
우선 책 도입은 굉장히 쫄깃합니다. 난리 나요.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요. 두근두근합니다.
싱클레어의 세계가 악의에 찬 악마에게 붙잡혀 조각날 위험에 처하거든요.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곧 싱클레어가 다음 단계의 세계로 발을 들일 것만 같습니다. 두근두근.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데미안이 짜잔. 신비한 척만 실컷 하는 녀석이 짜잔.
이때부터 뭔가.. 어라.. 싶어 집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가르쳐 준 요상한 비법들, 요상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게 어떤 의미는 있어야 하는데. 책 덮을 때까지 전혀. 전혀. 전~혀.
요샛말로 따지면 작가가 떡밥만 실컷 뿌려놓고 회수 안 한채 끝나는 엔딩 있죠? 딱 그런 느낌입니다.
잠깐 다른 설명이 필요해서 끼워 넣자면,
설명하기와 보여주기 기법의 차이점을 좀 말씀드릴 필요가 있어요.
(제 맘대로 썼으니 퀄리티는 좋지 않아요. 느낌만 봐주세요.)
1. 싱클레어가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2. 싱클레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자는 설명하기이고 후자는 보여주기 방식입니다.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전 소설에서는 적어도 후자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요. 왜냐.
소설 자체가 일종의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그 자체는 작가가 의도를 가지고 각색한 가상이자 상징이라서요.
보여주기 방식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울림이 달라요.
고수들은 후자의 방식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분들일 테고.
반면 설명하기 방식은 제가 곧 쓰게 될 논문처럼 아주 명확하고 간결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는 분야에서 적절한,.. 흐읍 (저 졸업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설명하는 방식이 소설에 전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설명은 작품의 이해를 높여주므로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적당한 가이드도 필요합니다. 너무 어려우면 읽다 덮어버리..ㅋㅋㅋㅋ
어쨌든,
데미안은 설명하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문제는 설명해야 할 부분에서 보여주고, 보여줘야 할 부분에서 설명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읽다가 짜치는 순간이 많았어요. 김이 팍.. 샙니다.
덮고 나면 뭔가 읽은 것 같은데 아무것도 읽지 않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둘리가 만든 공갈빵 먹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공갈빵 크게 먹고 마음이 답답해져서 써 본 뒷담화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헤세 아즈씨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도 있고.
그래도 하나 참작할 것은,
헤세 아저씨의 시대가
민족주의라는 광신적 이데올로기에 속아 삶의 판단력을 잃고 인간성마저 잃어버린 시대였다고 생각하면.
네, 그런 시대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학이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고 보는 사람마다 음미하는 지점이 다르니까요.
그리하여.
저만 재미없던 책 시리즈 1편은 큰 걸(?)로 시작해 보았습니다.
10편에 1편쯤 책 뒷담화 포스팅을 올려볼까 해요 ㅋㅋㅋ 사실 10편 욕하고 1편 건지고 있지마는...
문학이 제가 요즘 읽는 리딩과제도 아니고.. 눈 부라리고 비평할 필요가 없... 으니..
너그럽게 즐겁고 행복하게 읽겠습니다. ㅋㅋㅋㅋ
말이 길어졌네요. 또 만나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