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라, 내 안의 흑염룡아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의 줄임말이래요.) 도서 시리즈가 좋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습니다. 제목만 봐도 읽고 싶은 책들이 허다해요. 꽤 유명한 것 같더라구요.
지금까지 24권 정도 출간된 것 같고요. 교수님들이 철학에서부터 수학, 건축, 정치 분야까지 넓고 얕게 다뤄준 대중서 정도로 보입니다. 대학의 교양 강의 느낌도 있어서 한 권 읽고 나면 대충 그 분야의 문법 정도는 귀에 익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분야는 어려웠습니다.('왜 칸트인가?'는 중간에 못 알아듣고 중단했어요.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전 오늘 위에 나온 칸트 말고 ㅋㅋㅋ 저 같은 범인도 이해 가능한 서가명강의 17번째 시리즈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전에 서양 철학 강의를 들을 일이 있었는데 그곳의 강사님이 '우리가 이름이라도 들어 본 철학자들은 전부 세기의 천재들'이라는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 말이 꽤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 살아남지 못한 무명의 철학가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네요. 어딘가에서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철학자는 그러므로 엄청난 사람들이다,라는 결론이었는데.
그러니 하등 이상한 말 같고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겸손함을 가지고 잘 들어보래요.
암요, 저는 아무도 구려보인 적이 없고요ㅋㅋㅋㅋ, 저 같은 미생은 입을 합 다물고 고개나 끄덕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뭐 무튼간요, 철학가들은 자신들이 보는 세계를 또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념화 혹은 범주화시키는 사람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철학에도 사조라는 것이 생겼고 시대에 따라 그것이 변화해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무척 당연한 이야기를 해보았어요.
그중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의 대가입니다. '염세주의' 하면 중2병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 안의 흑염룡이 생각나기도 하고. 좀 더 진지하게 가자면 우울증, 삶의 무의미성, 회의주의 같은 심난한(?) 애들이 튀어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막연히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상이기도 합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슬퍼질까 봐요.('슬프다'는 단어 선택 무척 유아적이네요..)
그치만 이 정도 수준의 대중서는 소화가 가능해요. 아무리 내 안의 흑염룡을 끌어내는 '염세주의' 키워드가 메인이어도 교수님이 물에 많이 타서 희석시켜 준 쇼펜하우어는 거의 진라면 순한 맛....
그리고 사실, 책 읽는 내내 우울할 틈이 없어요. 교수님이 중간중간 소개해 주시는 쇼펜하우어가 되게 골 때리는 할아버지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고로 삶이 잘 안 풀리다 빛을 보면 까맣고 암담했던 세상이 갑자기 컬러풀하게 보이고 그런 거죠. 이해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인 철학이 이렇든 저렇든 관심병도 좀 있던 것 같은 쇼펜하우어는 말년을 매우 낙천적으로 보냈다고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코드 증말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신을 다루는 모든 신문 기사를 찾아서 탐독했다'는 부분, 전 여길 읽다 카페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고요...
유명해져서 만족스러워진 셀럽의 삶이라고나 할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셀럽의 삶이든 뭐든, 쇼펜하우어가 겪은 잘 안 풀리던 시절의 인생 전반은 염세주의 철학을 쌓아 올린 밑거름이 됩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성장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좀, 슬픈 구석이 생겨요. 그의 가정환경과 성격이 오늘날의 금쪽이...... 같은 느낌이 물씬 나거든요. 요상한 여성혐오도 있고요, 기적의 논리로 타인을 이겨먹어야 하는 공격성도 있구요.. 사실 가까운 지인으로 두기 힘든 스타일..ㅋㅋㅋ
그런데 말이죠. 이 책을 읽다 보면 묘하게 입장이 뒤바뀌어 버려요. 그가 인생을 정의하는 모습은 차갑다 못해 뼈에 구멍 날 것 같은 냉골인데요.
삶에 관한 한 날카롭고 처절한 그의 비관이, 웃기게도 이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살만한 것이라는, 마법 같은 동력으로 변화합니다.
시나브로 스며들어 읽다 보면 우습게도 두 다리에 힘주고 다시금 걸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독서자문가(아님) 이동진 영화평론가(맞음)께서 간간히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요. ('간간히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니 되게 어른 모시는 느낌인데, 제가 이 분 오랜 덕후라. 헤헿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동진님 인터뷰를 됴금 자주 잘 읽고 가슴에 고이 새기고 뭐 그러고 삽니다. 데헷ㅎㅎㅎㅎㅎㅎ)
본인은 굉장한 '비관주의자'라는 거예요. 때문에 어떤 상황이든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고 생각해서 그보다 나았다면 그건 좋은 결과이지 않느냐, 받아들일 수 있다, 의 느낌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아,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역시 옵하(...)는 뭐가 달라도 달라, 싶고.
쇼펜하우어 철학의 역설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악의 경우를 인정하고 살아가면 또 삶이 그런대로 살만해지는 순간이 오거든요.
거지 같음(?)을 거지 같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게 어느 순간,
"원래 그래" 마법으로 변해요.
원래 그런 거라면,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휘청이며, 맞으면 울고 때리면 아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습게도 불행해할 필요가 없다는 역설이 생겨납니다. 쇼펜하우어 철학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내려온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물론 그는 그 나름의 불교적 세계관을 도입하여 형벌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더 힘들어 보여서 패쓰.
그래서 말이죠. 삶이 무척이나 지치고 권태롭고 허무한 분들이라면. 본인보다 더 독하게 삶을 직시한 철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서 욕 한 사바리 시원하게 먹고 나오는 기분으로요. 그러고 나면 다시 웃으며 일상을 시작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 봅니다.
교수님이 순하게 떠먹여 주는 쇼펜하우어 이야기, 한 잔 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다음 발걸음을 힘내서 걸어가도록. 이만 줄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