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1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마을에 자리한 할머니 댁은 네모반듯한 모양의 넓은 마당과 시원한 대청마루가 있고 장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독대와 그 아래 위치한 수돗가에는 무쇠 펌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무쇠 펌프는 마중물을 부어야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신기함에 줄곧 나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고모들이 태어날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심으셨다는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는 할머니 댁을 감나무집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작은 골목길에 나란히 위치한 이웃집들은 낮지도, 높지도 않은 담벼락과 늘 열려있는 대문 덕분에 동네 이웃들이 자주 오가며 허물없이 지내는 온기 가득한 곳이었다.
도시에 살다가 시골 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온건 1986년 10살 무렵이었다.
그해 할아버지께서 사고로 많이 다치셨다. 아빠께서는 1년여를 생업을 체 쳐 두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유명하다고 하는 병원은 다 찾아다니시며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셨다
생계는 엄마 몫이었다.
하루는 의사 선생님께서 더 이상 해드릴 게 없으니 가족들이 결정을 해야 할 때라고 했다. 아빠는 몹시 힘들어하셨다.
아빠께서는 의식 없이 누워계시는 할아버지께 흐느끼면서 얘기를 하셨단다.
“아버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네요. 아버지가 대답해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할아버지께서는 이 말을 듣고 계셨던 걸까?
힘겨워하는 아들에 대한 회답이었을까 아님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삶의 의지가 반응했던 걸까?
화내는 모습을 단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한결같은 모습은 당연한 줄로만 알았고 속내를 내비치신 적을 본 적이 없기에 할아버지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적적으로 할아버지께서 손가락을 움직이시기 시작하며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 여섯 식구는 2년여를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다.
손자 세명이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끌겠다며 서로 아옹다옹하니 손자들의 그 모습이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좋으셨겠는가, 당연히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으셨다.
어느덧 아빠의 부축을 받고 서 계실 수 있게 되었고 조금씩 걸음도 걸으실 수 있게 되셨으니 기적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개구쟁이 남동생 세명은 성격이 활달해서 늘 함께 어울려 다녔고 재미난 일들과 비밀들을 셋이서만 공유한 채 삼 형제의 의리가 빛을 발하던 것도 이때였다.
새하얀 낯빛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나는 할머니 동네에서 까무잡잡한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하얀 축에 속했고 내성적인 성격이 더해서 도시 아이 특유의 새침함이 있었다.
늘 깔끔한 원피스에 반짝반짝한 구두, 야무지게 손질된 단정한 머리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식이라면 엄마의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자식 사랑이 끔찍한 엄마의 자존심이었다.
엄마 덕분에 우리 사 남매는 구김살 하나 없이 성장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 동안 아빠의 일을 도와 시내로 출퇴근을 하며 할머니 댁의 큰 집안 살림까지 혼자 감내하는 엄마는 또다시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집오고 시작된 고된 시집살이에 우리 사 남매가 태어나 분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합가를 했으니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불 보듯 뻔했다.
바지런한 엄마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할머니 댁 집안 살림들은 반질반질한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이웃들은 오가며 엄마의 찬사를 입이 닳도록 했었다.
자식 사 남매를 키우며, 살아갈 희망을 찾고 있음을 알았기에 바지런한 엄마를 두고 하는 이웃들의 찬사가 엄마에게는 썩 달가운 말은 아니었을 거다.
힘든 그 상황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몸을 고되게 움직여야만 했고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철없는 남편과 혹독한 시어머니에 시누이가 6명이었다. 다행인 건 할아버지가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거다. 홀로 힘겹게 견디는 상황에서 ‘힘들지’하며 단 한 명이라도 공감을 해주는 내 편이 있다는 건 살아갈 숨을 불어넣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나는 늘 엄마가 측은했다.
마을 어귀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가 있었다.
여름이 되면 시냇가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멱을 감거나 미꾸라지와 가재를 잡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한쪽에는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할 수 있도록 편평한 바윗돌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주말에는 빨갛고 큰 대야에 8 식구의 빨래를 가득 담아 엄마를 따라 빨래를 하러 따라가곤 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나를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해 보려고 등 떠밀어보지만 내 원피스와 머리에 꽂힌 장신구에 집중된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혼자 노는 쪽을 택했었다. 엄마가 그 많은 빨래를 다 하실 동안 나는 물속의 물고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지루하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을 만큼 엄마가 옆에 있으면 모든 게 좋았다.
할머니 집 정지(부엌)에는 아궁이가 두 개가 있다.
정지 입구 바로 왼쪽에는 찬장이 있고 맞은편에 설거지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무쇠 펌프만큼이나 할머니 댁 아궁이는 나의 재미난 놀이터가 분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복하게 자란 엄마는 신식 생활이 익숙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모든 게 불편했을 할머니 댁 생활이 나는 재미난 놀이 거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저녁을 하는 엄마에게 부지깽이를 달라고 떼를 써서 내가 불을 지피곤 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 짜증 한번 낸 적 없는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릴 때가 있다. 아린 마음은 언젠가부터 할머니 집 담벼락을 좋아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높지도 낮지도 않은 담벼락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겸손함 덕분인지 늘 나에게 기댈 수 있는 등이 돼주었다. 나에게 담벼락은 특별했다.
고즈넉한 마을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면 할머니 동네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아궁이를 타고 올라온 따뜻한 연기는 온 마을을 감싸 안고 포근함으로 무장한 채 시간은 정지되고 현실이 아닌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던 곳이었다.
‘이웃집 토토로’ 애니메이션을 너무 좋아하는 이유가 이곳에서 지낸 2년여의 시간이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악"
어느 날 저녁 정지에서 엄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무서운 소리였다.
무슨 일일까?
순간 두려워졌다.
할머니가 엄마를 모시고 어디론가 분주히 가신다.
세상의 전부인 엄마 걱정에 맨발로 나는 그 뒤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동네 마을 분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고 갑자기 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네였다.
설거지를 하려던 엄마의 고무장갑 속에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기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엄마는 여느 때처럼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려던 참에 숨어있던 그 징그러운 녀석이 엄마의 가운뎃손가락과 인접한 손등을 문 것이다.
그때 갑자기 할머니가 지렁이를 몇 마리 잡아다 엄마 손에 얹시는 거다
엄마는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와중에도 지렁이를 보고 기겁을 하셨다.
할머니는 늘 할머니만의 민간요법이 효험이 있다고 굳게 믿고 계셨다.
언젠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웃집 개가 빼꼼히 열린 대문 틈으로 달려 나와 나의 종아리를 문 것이다.
아파서 울고 있는 나는 시내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마실을 다녀온 할머니는 장독대로 가시더니 된장 한 움큼을 떠 와 내 종아리에 바르는 게 아닌가.
급히 집으로 온 엄마는 빨간약으로 소독을 급하게 하고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그깐일로 병원을 간다는 엄마를 흘겨보는 그 눈빛이 아직도 선하다.
된장은 그렇다 쳐도,
세상에 이번에는 지렁이라니..
나는 아빠를 찾았다.
아빠가 오셔서 당장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가길 바랐다.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유복하게 자랐다.
대학 입학 즈음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97년 IMF 역시 우리 집을 비껴가진 않았다.
분명 힘들었을 시기에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풍족하게 살았을 때나 그렇지 않았을 때나 물욕이 없는 나의 천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결혼을 하고 마흔이 넘어 생각해 보니 가난이 힘든 게 아니라 가족이라는 인연에 사람들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연이야 하늘이 맺어준 것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상황은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있기에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스무 살, 그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가 사랑이 많은 엄마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든든함 때문이었고. 비참할 정도로 어려웠던 그 시기에 우리 사 남매의 우애는 더 끈끈했고 마냥 포근하고 편안했고 이상하게도 행복하기까지 한 이유 역시 그 중심에는 항상 엄마가 계셨기 때문이다..
훗날 갈등이고 모순이지만 이 점이 나를 힘들게도 했다.
아직도 아빠가 오시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둘러싸고 있고 차마 아파하는 엄마 얼굴을 볼 수가 없어 한 발짝 멀찍이 서있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댄 채 유난히 까만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며 환하게 떠있는 달을 보며 너무도 간절하게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희한하게 따뜻한 온기가 있는 담벼락은 낮 동안 저장해 놓은 복사열 때문인지 기대고 있는 내 등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었다.
겁에 질린 내가 기댈 곳은 담벼락밖에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드디어 아빠가 오셨고 마을 사람들은 아빠가 지나갈 수 있게 양쪽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
그 길로 아빠를 따라 나도 따라 들어갔다.
“아빠, 빨리 엄마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요! 어서요”
나는 울부짖었다.
아빠도 할머니의 지렁이 요법은 황당했는지 엄마를 모시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면 엄마가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드디어 병원이다.
시내에 있는 가장 큰 병원이다.
늦은 시간이라 응급실로 향했고 아주 많이 앳 때 보이는 남자 의사 한 명이 나타났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의사에게 빨리 엄마에게 뭐라도 해보라며 재촉하는 눈길을 보내며 초집중을 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듣던 앳된 의사는 한 뼘 정도의 두꺼운 책을 한 권 들고 나오더니 뱀에 물린 해독제는 있어도 지네에 대한 해독제는 없다며 병원에서 어떤 처치도 불가능하다는 말만 할 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 미친 새끼, 저 딴 새끼가 의사야!’ 10살 아이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결국 무능한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치료가 안되면 날이 밝은 대로 더 큰 도시로 가야 했고 대도시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려면 2시간을 고속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86년 여름이었다.
하는 수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방 한쪽에 누워계셨다.
내가 엄마 주위를 맴돌며 밤을 새우는 동안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한 조각의 기억은 누워있는 아픈 엄마에게 질타를 하던 할머니의 심술궂은 목소리 뿐이었다.
엄마는 늘 동그랬고 할머니는 늘 네모였다.
심정적으로 늘 고달픈 이유였다.
방 한쪽 구석에서 아픈 엄마 옆에 잔뜩 웅크린 채 눈물만 말없이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검지 손가락을 길게 뻗어 엄마 코 아래에 대보기를 수백 번을 반복하면서 엄마 대신 저를 데려가 달라고 하느님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밤새 매달렸던 거 같다.
그리고 생각했다.
엄마를 살리겠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엄마를 살려보겠다고.
10살 아이의 첫 꿈은 의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