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릉'
처음 보는 전화번호로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입니다.
휴학 기간이 다 되어가 복학 신청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아차, 잊고 있었다. 벌써 복학 일이 다가오는구나'
한참을 복학 절차에 대해 통화한 후 "네, 알겠습니다."라는 마무리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첫아이를 갖고 처음 느껴보는 입덧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아침마다 1시간가량의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며 푸시 맨에 의해 배속에 아기는 여기저기 부딪혀야 했다. 심한 입덧으로 며칠째 음식을 먹지 못해 링거로 아이에게 영양을 줘가며,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채 해야 할 공부와 돌보아야 할 뱃속의 아기를 저울에 올려놓고 두 고민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문득 이 생활이 지속됐다간 뱃속의 아기를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움이 엄습했다.
결국, 교수님의 강한 만류에도 다니던 대학원을 휴학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이를 낳은 후 바로 복학할 생각이었다.
임신기간 중에 섭렵했던 여러 종류의 유아전문서적과 유아전문가는 '3세 까지는 아이와의 애착 안정을 위해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최선입니다'라고 수많은 육아서들이 살아움직이며 내 귀를 향하여 한목소리로 외쳐댄다.
100일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수많은 밤을 고민했다.
각자 일이 있으신 양가 부모님께 아이를 부탁드린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아이를 맡기려니 아이가 보내오는 해맑은 눈빛을 내가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다.
태생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나는 '나의 목표'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둘째 아이를 바로 갖기로 계획했고 학생 맘이 되더라고 두 아이가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으니 더 나을 거라고 착각을 했다. 착각은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의 존재가 주는 에너지는 신비함을 넘어 신성하기까지 했다.
미천한 나의 세상보다 이미 더 큰 세상을 가지고 있는 듯 빛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며 나의 목표는 희미해졌다.
*
"나, 이제 내 일을 시작해 볼까 해."
"지금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해보겠다는 거야? 지금은 당신 건강만 신경 써야 하는 거 알잖아"
"그래도 더 늦기 전에 희미해진 '나의 목표'를 다시 찾아야겠어."
"당신은 이제 혼자 몸이 아니야. 나와 아이들의 세계야. 그러다가 다시 악화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건강을 지키며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했으면 해"
남편은 작은 기업체를 이끄는 CEO다.
바쁜 사업을 뒤로한 채 4년 가까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가야 하는 병원행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함께해 주었다.
세상의 시간을 나를 위해 맞춰준 남편과 아이들이었다.
"여보 우리 회사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 퇴근한 남편이 재킷을 벗어 걸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희미해진 나의 목표 찾기에 며칠을 우울해했다.
허락되지 않은 건강보다 매일매일 찾아드는 통증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넥타이를 받아들며 당황스럽게 답했다.
"당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야?"
남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늘 그랬듯 저녁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향한다.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불편해하는 나로 인해 그동안 남편은 회사일과 함께 익숙하지 않은 집안일까지 하며 부단한 노력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
남편은 창가를 둔 중심 자리에 내 책상을 준비해 두었다.
책상 위에 내 이름이 새겨진 명함까지 놓여있었다.
긴 투병에 우울증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남편의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운명이라는 이름하에 놓인 충실한 자기 이행일지도 모를 나의 Soul mate!
남편의 배려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출근과 퇴근 역시 남편과 함께였다.
내 컨디션이 허락되는 날 평균 일주일 중 한 번의 출근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가슴이 벅찼다. 그렇게라도 뭔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행복했으며 평온했다.
이제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이 생에서 내가 하고 싶고 해내고 싶었던 일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받아왔던 많은 도움들을 더 풍요롭게 돌려줄 수 있는 나의 길로
타닥타닥 글자 안에서
몽글몽글 내 생각대로
뚜벅뚜벅 맨발로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나의 착각 속에서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