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분기 회고
생일이 3월 말인 건 꽤 좋은 일이다. 생일초를 후우- 불고 나이를 찐으로 한 살 더 먹으며 새로운 다짐을 할 아주 좋은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분기마다 회고를 할 때에는 당장 지난주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서 캘린더와 메일함을 더듬더듬 찾아야 하는데 이번 자체 회고는 그럴 것도 없이 하나하나 다 선명하게 기억이 나서 거리낄 것이 없다. 모두 다 내가 원하고 선택해서 했던 일들이라 그런지 마치 인사이드아웃에 나오는 생각구슬(?)들처럼 자기들만의 색깔로 모양새 좋게 앉아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긴 했지만 회사 다닐 때처럼 뭉텅이로 훅 잘라간 느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상하리만큼 하루하루가 기억난다.
하나의 큰 마무리가 있었고, 가뿐하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가족에게 아주 기쁜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큰삼촌과 강원도 여행을 하고, 내 새끼들과 양양 낙산사 가서 초도 켜고, 아직도 꿈같은 모로코에도 다녀왔고, 제주에도 찐하게 다녀왔다. 얼렁뚱땅 평택에 가서 부대찌개도 먹고, 이천에 도자기 구우러 다녀왔다. 막상 쓰고 보니 엄청 돌아다녔잖아? 일본어는 이제야 회피형 학습이 아닌 나만의 리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조금 느슨해져서 5단계 재수강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배운 것을 또 배우게 된 덕분에 얻은 자신감으로 불쾌…아니 무지의 골짜기를 넘겼다. 좋은 영화들도 많이 봤다. 영화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취미 카테고리에 영입할 수 있을 정도로 즐기게 되었다. 아마도 키미가 소개해준 필름클럽 덕분이 아닌가 한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는 새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그에도 부합하고 나에게 시민으로서 주어진 예산을 아주 잘 쓰는 느낌이랄까. 나름 재밌는 책들로 신청하고 있으니 동네 주민 여러분 많이 많이 대출해 보시길. 성우학원 정도가 유일한 실패(?)였다. 나는 그저 말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나 전달을 좀 더 잘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EBS 공채 준비를 위한 아역 연기를 시키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 전혀 학원의 잘못은 아니고 내가 번지수가 틀린 것이었다. 좋은 발음과 발성으로 재미난 얘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떤 훈련을 해야 하지? 내가 유머 계열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야기보따리가 한가득인데 요걸 좀 써먹고 싶다.
4월부터는 사부작사부작 일에 시동을 건다. 3월까지는 말 그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했던 시간이라면 2분기는 탐색을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나는 의외로 ‘선택을 위한 탐색의 과정’이라는 프로세스가 너무 짧았다. 하면 갈아 넣어서 하고, 그렇게 안 할 거면 아예 시작도 안 하고. 어차피 내 브런치니까 되게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귀찮아서 그랬다. 나는 물건 살 때 가격 비교도 잘 안 한다. 너무 치명적이지 않다면 일단 가는 거다. 뭔가 찾아보고 알아보는 과정이 영 불편했다. 그리고 탐색하는 거랑 겪는 거랑 늘 너무 달랐으니까 일단 시작하고 보자 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모르는 게 속이 편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시작해 버리면 나는 어느새 그 일과 ‘일아일체’가 되어있고 그 집의 소가 되어 밭을 갈고 있더라. 이런 나의 면모를 일찍 간파한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부리기 쉬운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이제야 든다.
몇 번을 그렇게 하고 보니 좀 힘도 들고 생각보다 내 손에 쥐어지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약간 맥이 풀리기도 했다. '나도 늙었다'라는 단순한 맥락보다는 이제는 내가 가진 크레파스 색깔이 어릴 때처럼 48색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까지 잘 깎아놓은 좋은 연필 몇 자루 가지고 남은 삶의 아웃라인을 슥슥 그려가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다짜고짜 빨간색 크레파스부터 들고 설치던 내가 이제야 비로소 밑그림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다. 재미있고 짜치고 짜릿하고 뒷북 오진 나의 인생 같으니.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나에게 훨씬 더 잘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좀 미친 사람 같지만 남에게 묻듯이 “너 그래서 지금 뭐가 하고 싶은데”라고 속으로 묻기도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이 시간이 아까워죽겠다. 안달복달하지 않는 지금의 리듬이 꽤 마음에 든다.
여름이 일찍 시작된다고 해서 바짝 쫄아있지만 2분기도 1분기만큼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아니어도 할 수 없고. 오늘이 좋아야 일주일이 좋고, 그래야 한 달이 좋고, 일 년이 좋고, 인생이 좋아진다. 그 슬로건을 쓸 때는 사실 이렇게까지 와닿지는 않았는데 요즘의 나는 내가 쓴 말 그대로 살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너무 수모로 여기지 말고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사주에 흙이 많아서 그런가. 나는 자꾸 뭘 받으면 다짜고짜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리려고 한다. 그게 좋은 식물인지 나쁜 식물인지도 모르고. 이제는 식물도 좀 골라 받아야지. 나도 연꽃처럼 둥둥 떠다니다 그냥 무심하게 툭 꽃을 피워야지. 꽃 안 피면 잎 따다가 연잎쌈밥이라도 해 먹으면 된다. 쭉정이는 가라!!!!!
아마도 2분기 회고를 쓸 때 즈음이면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너무 더운 날씨에 너덜너덜해져 있겠지만 상자에 곶감 하나하나 채우듯이 하루하루 또 채워보겠다. 기후위기는 늘 걱정이지만 자꾸만 짧아지는 봄에 동동거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좀 더 잘 누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