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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 잡고

벽은 내가 한 번 넘어볼게...그러니 좀 도와주라

by 제일제문소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나보고 친구가 많다고 한다. '친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 같지만 뭔가 이런저런 약속이 많아 보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자주 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여러 회사를 다녔다 보니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친구 없어 보인다는 말보다는 나으니까 그런가보다 한다.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나의 지금 모습이 가장 가깝게 지내는 5명의 평균이네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우 그 정도면 나는 훌륭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주변 인재풀이 좋으니 사람 소개해주는 걸 일로 해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런 좋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내 옆에 꽁꽁 묶어둔 것은 나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


물론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스쳐갔다. 말 그대로 스쳐, 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갔다는 점이다. 스치는 과정에서 약간 상처도 나고 울기도 했지만 과거형이다. 나 스스로가 못 미더워 사람에게 절절맸던 시절도 있었다. 부족한 걸 채우고 싶으니까 자꾸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고, 마음 써주기를 기대했다. 결국 내 인생을 구해야 하는 건 나인데 자신도 없고 잘 몰랐으니까 나보다 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찾아다녔다. 물론 여전히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고,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에 가족 말고 그렇게 솔직한 얘기를 해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면 가족도 서로의 사정을 더 모른다. 붙어있던 시간이 길다 보니 어림짐작이 좀 더 잘 들어맞을 뿐. 다 내 욕심이다.


이제 반년이 좀 넘었나. 나에게 붙어있던 차포를 다 떼고 진짜 내가 쥐고 있는 패가 뭔지를 솔직하게 볼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나를 직면한다는 게 얼마나 서늘하고 무거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휘청휘청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태 용케 버티고 있다. 어떤 날은 일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나 싶다가 어떤 날은 그래도 이런 건 내가 남들보다 좀 잘하지 싶고. 기분이 널을 뛰는 날에는 "갱년기가 빨리 올랑가"하고 개그로 넘기는 여유를 부리다가도 AI로 위협받는 인간의 일자리 같은 다큐를 보며 우울해하기도 한다. 사실 여전히 내 손에 쥐고 있는 게 뭔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걸 파악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지금까지 능숙하게 해 왔던 일의 경험, 주변에서 자주 들었던 얘기들,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 없이 내가 꾸준히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하나씩 해보고 치우고, 해보고 치우고, 그러다가 무언가 실마리가 잡힌다면 그걸 계속 굴려보고...나의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무념, 무상, 무지성으로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차라리 틀을 만들라면 만들었지, 틀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나에게 가장 막막한 일이라 차포를 뗀 세상은 너무나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빼박 나만의 틀을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또 눈물을 닦으며 에피소드 부자가 될 일만 남았구나 하고 옆을 보니 내 패가 뭐가 됐든 판을 벌리면 같이 고스톱 쳐줄 사람들이 내 손을 잡아주고 있네…?


내가 내 발로 솔솔버스에 몰입해서 내리지 않으려고 하는 진상될까 봐 주변에서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쑥스러워하며 마음만 받았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깊이와 인사이트를 너무 간과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너 이런 거 하면 잘할 것 같은데?"라는 얘기를 할 때, 되든지 말든지 하는 마음으로 얘기하지는 않으니까. 내가 남들 잘하는 건 귀신같이 잘 보는데 그렇게 시작된 인연들이 나를 보며 정성스럽게 해 준 얘기들을 스스로에게 엄격한답시고 잘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성격상 도와달라는 말을 해야 할 때는 갑자기 극내향인 엄태구처럼 말도 못 하고 바지 앞쪽만 벅벅 문지르고 있으니 자꾸 혼자 뭐든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제대로 된 한 발짝을 떼지 못했던 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혼자 어른스럽게 잘 해결해야지 하다가도 좌절한 물만두 상태가 되어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캘린더를 다급히 채운다. 인생 혼자 사는 건데, 자기의 문제는 결국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 건데, 다 아는데...그래도 나는 '이거 되다 안되다 하는 건데 그냥 한 번 써봐요'하고 보내주는 장비 하나가, '이런 거 하시면 진짜 잘할 것 같은데' 하는 귀여운 기대감 하나가, '그건 제가 도와드릴게요!'하는 접대용 멘트 하나가, '언니 또 혼자 뭔가 하며 재미나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하는 안부 하나가 마음을 그득하게 채우는 사람이라 그 마음에 부응하고 싶어서라도 또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대면서 퍼진 만두피를…아니 내 몸을 일으켜본다.


그리고 그동안 딱히 놓은 적은 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손도 한 번 꼭 잡아보려고 한다. “저 좀 도와주세요!!!”해보는 거다. 어차피 혼자 다 하지도 못하면서 지킬 수 없는 약속 안 하려고, 아예 신세도 안 지려고 하는 어쭙잖은 꼿꼿함도 갖다 버릴 거다. 화끈하게 신세 지고 꼭 보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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