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 나이 헛먹지는 않았다."
스물셋, 팔레트, 에잇, 어떤 특정 나이에 대한 노래를 내는 아이유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요란하게 나이 먹는 사람이라고 하는 얘기에 "그 말도 맞네." 했다. 하지만 그건 아이유가 요란을 넘어선 국힙원탑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해서 그런 거지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굳이 시간을 나누고, 달력을 만들고, 나이를 계산하고 하는 행동은 구분되어지지 않은 시간의 망망대해에서 출발점과 마침표를 찍고 싶은 인간의 갈망과 의지였을 거다. 그리고 저울에 무게를 잴 때처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영점이 필요하니. 제일 만만한 게 나이 아니었을까. 예쁘고 잘생겼다고 한 살 덜 먹고 못생겼다고 한 살 더 먹는 건 아니니까. 견뎌낸 시간만큼 다들 똑같이 부과되는 것 아닌가.
어렸을 때는 내가 한 60살쯤이면 인생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릴 때 봤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연세가 그쯤이었고, 나의 조부모님은 다 일찍 돌아가셔서 긴 수명의 괴로움을 경험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물론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노환과 병으로 힘들어하시는 모습은 마음이 아팠지만 내 부모님의 나이가 어릴 때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이에 다다른 지금조차도 잘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건 어쩌면 지금 나의 처지가 그때의 부모님과 다른 것 때문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이 달라진 것도 있을 것이다. 환갑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해 보면 그 딸인 엄마가 마흔, 내가 열다섯 살이었다. 지금 나는 열다섯은 무슨, 다섯 살짜리 강아지도 하나 없다.
나이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별로지만,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 억지스럽다. '밧줄로 꽁꽁'할 필요는 없지만, 헛짓거리를 하지 않도록 적당히 묶어놓을 필요는 있다고 본다. 또 그렇다고 나이에 절절맨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다. 하루하루 똑같은 모양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365개의 시간을 쌓아 숫자 하나를 더 가진다고 뭔가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 시간을 살다가 문득 나이를 실감하게 될 때도 있다. 혼을 쏙 빼놓는 한 뭉텅이의 시간이 과거가 되어 비로소 지나가고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확인하려고 할 때, 그럴 때 책상 위에 쌓여있던 고지서처럼 그 숫자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질문과 함께.
몇 살에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공식은 없지만 사람들은 서로 곁눈질로 대충 안다. 오히려 그 트랙에 충실하게 잘 살아온 사람들은 레퍼런스들이 많으니 속이 편할 것 같다. 적당히 비슷하게 살면 되지 않나. 그런데 나처럼 일찌감치 그 트랙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조금 골치가 아프다. 나 스스로가 레퍼런스가 되겠다는 열망도 야망도 당연히 없거니와 뭘 좀 보고 따라가고 싶을 때 막막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람 특) 레퍼런스 있어도 그대로 따라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가 나를 돌아봐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점검은 해야 하니까 유체이탈해서 봤다가, 가자미눈으로 째려봤다가, 좀 불쌍할 때는 고운 눈으로 봐주고 뭐 그런다.
유난했던 지난 3개월 때문에 스스로에게 조금 후하게 굴었던 감도 있지만 요즘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크게 부대끼는 마음이 없다. 더 할 수 없을 만큼의 걱정을 해봤고, 더 할 수 없을 만큼의 노력도 해봤고, 더 할 수 없을 만큼의 마음도 썼더니 생각보다 손이 탁탁 털어진다. 내가 탄 이 롤러코스터의 핸들이 핸들이 아니고 그냥 동그랗게 생긴 핸들 모양의 손잡이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거 그냥 손 놓고 타도 똑같구나'하는 마음에 오히려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고 두 손 번쩍 들고 타게 된다고나 할까. 앞으로에 대한 걱정도 너무 많이 해봤지만 뭐 하나 내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었던 덕분에 전두엽 뒤의 걱정중추가 아예 마비가 된 느낌이다(아님).
지금의 이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했던 수많은 헛짓거리들을,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수치심과 패배감을 엉뚱한 데 풀지 않고, 미쳐버리지 않고, 최대한 나 스스로 소화해 내려고 애썼던 덕분이라고 좀 칭찬해주고 싶다. 그렇게 했으니까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도망 안 가고 곁에 있고, 눈물을 훔치며 배운 것들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는 거 아닌가. 나는 나이 드는 것이 점점 더 좋다고 늘 말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걱정과 불안의 숙주로 살아와서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1인분 하면서 잘 살아온 하루의 조각들이 계속 쌓여 강화된 나의 멘탈이 J커브를 그리는 것인데. 그냥 멀뚱멀뚱 숫자만 쌓아가던 나이가 괜히 덕을 보네.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우리 나이 헛먹지는 않았다." 친구의 말이 자꾸 마음에 남아서 음력으로 굳이 한 살을 더 먹은 오늘, 아이유인냥 나이타령을 해본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