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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이 만드는 역사

<제국대학의 조센징>을 읽고

by 제일제문소

평소 같았으면 내용이 궁금해도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일단 기피했을 것 같은 책이지만 긴 연휴의 버프를 받아 과감하게 대출신청을 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기도 전에 피하게 되는 이유는 보통 감정적인 문제다. 작금의 현실과 맞물려 문제의 뿌리 깊음을 인지하게 되고 그 해결책이 요원하다고 느껴질 때다. 보다가 울화통이 터져서 그만 책장을 덮게 된달까. 그런 부분에서 읽기 전에 조금 걱정했던 책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빡치지 않고(?) 담담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역사 버전을 읽는 느낌이었달까.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뜨거웠던 사회적 반향과는 달리 막상 나는 '이게 소설이야, 사회학과 논문이야' 싶었다. 물론 소설과 이런 인문사회과학서적을 비교하는 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그만큼 감정의 동요 없이 읽었다는 뜻이다.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남아있는 여러 부정적인 면모들이 친일파 척결을 제대로 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옷만 바꿔 입고 이 나라의 기틀을 다졌기 때문에 현대사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고 우리만의 가치를 바로 세울 수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대단한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기회주의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는 결말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크다.


내가 '조센징'이라는 워딩에서 너무 지레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지만, 작가는 의외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물의 당시 상황과 그 이후의 행동들을 그저 보여준다. 작가가 먼저 나서서 "저 새끼가 나쁜 새끼예요!"하지 않고, "이 사람은 이랬고 저 사람은 저랬습니다. 근데 이 사람이 저런 행동도 하고, 저 사람이 이런 행동도 했습니다." 해버리니까 그다음은 '나라면 어땠을까'로 이어져 책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떤 선택들을 한다. 민초들의 자그마한 선택은 사실 이렇게 역사(비교적 승자, 권력자에 의해 기록되는)의 일부가 되기 어렵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보, 선택, 결정 같은 것들이 다 흔적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본인이 원해서 했던 선택도 있을 것이고, 두려워서 했던 선택도 있을 것이고, 의도하지 않은 선택도 있을 것이다.


역사가 두려운 것은 이것이 현재에 맞게 계속 재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미래에 의해 재해석되는 것을 매번 염두에 두고 선택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도덕이나 윤리 같이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보편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선택하면 수치스러움은 비교적 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득권이나 눈앞의 이익에 따라 판단하면 그것이 100년이 걸리든 200년이 걸리든 후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게 분명하다.


나는 언제나 엘리트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라는 관점보다는 내가 그러질 못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많이 배운 사람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나라꼴을 보며 나의 신기루 같은 믿음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 결국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1인분을 하는 사람들이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조금 남은 에너지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표하고 움직일 때 조금이나마 들썩-하는 것 같다.


최근에 <하얼빈>을 봐서 더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독립에 자기의 인생을 걸어버린 분들의 마음은 더더욱 짐작하기가 어려워졌다. 일단 나는 절대 못했을 그릇이거니와, 조국의 독립이라는 엄청난 대의명분보다는 안 하고서는 못 배기는, 자꾸 눈에 밟히는 그 마음과 결국 대문을 나선 행동이 모여 지금이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더 마음이 찌르르해진다.


사족 1) 책을 읽기 전에 뉴스를 보며 도대체 합리적인 보수란 무엇인가 생각해 봤는데 문득 이회창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 정도면 합리적인 보수일까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짜게 식었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니 친일코어의 결정체였다.

사족 2) 일본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 한국어로 된 일본 역사 관련 책만 읽고 있다. 언어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모든 것을 반영... 하니까 총체적인 학습이 필요... 하긴 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남들 공부하는 것보다 2배는 걸리겠다. 애니메이션도 안 좋아하고 일본어 못하는 일본 잡타쿠로 남을 듯.


+ 독후감 작성의 변

나에게 독서는 레저다. 즐기려고 하는 것이라 사실 나는 책을 대충 읽는다. 재밌으면 읽고 재미없으면 안 읽는다. 이 스트레스로 가득한 세상, 내가 책까지 억지로 읽는 건 싫어서 쉽게 사고 쉽게 본다. 그러다 보니 독후감을 막상 쓰려고 앉으면 쓸 말이 없다. 대충 읽으니 발췌하기도 귀찮고 내용도 금방 까먹고. 근데 너무 기록을 안 하니까 읽은 책도 기억을 못 해서 조금씩 남겨두려고 한다. 오늘은 첫 번째이기도 하고,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길게 썼는데 노잼인 책들은 그냥 야박하게 한 줄 평만 남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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