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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보안관 Jul 20. 2020

쇼윈도 모녀를 아시나요?

#1. 엄마의 정신건강을 위해 수재가 되어야 했던 딸 

종로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스물넷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여덟살이나 나이가 많은 아저씨에게 시집을 온 나의 엄마. 

신문물을 좋아하고, 유행을 좇으며 서울생활에 만끽하려던 찰나에, 두시간에 한번씩 읍내에 가는 버스가 다니는 시골이라니...그 시골은 엄마의 고향이기도 했다. 

시골이 싫어서 서울로 떠났건만, 결혼을 해서 정착한 곳이 다시 내고향 그 깡촌. 그때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게다가 시어머니,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살아야 했던 신혼생활은 21세기의 시선에서 보면 정상적이진 않았을것 같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엄마의 상실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유욕과 허영심많은 이십대에 그야말로 창살없는 감옥에서 신혼생활이라니. 

엄마의 입장에서는 이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리고 엄마는 평생 부러질일 없는 든든한 버팀목을 얻었다. 보물같은 첫번째 자식, 나다. 


잠깐이지만 서울러였던 엄마가 시골 촌뜨기로 전락한 것이 엄마 스스로에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그런 상황에 자식이 태어나니 엄마도 뭔가 주변에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나보다. 

비교하려고 해봐야 논,밭에서 농사일 하는 사람들이 전부인 시골에서 엄마는 내가 항상 특별하길 원했다.

우유도 그 당시 제일 비싼 파스퇴를 우유를 먹었고, 시골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운 치즈가 매끼니 밥상에 올라왔었다고 한다. 그 당시 최신 유행이었던 반지시계, 팩 오락기, 돈 있는 집이라면 하나씩 있었던 피아노...


사실 돌이켜보면 시골에서 살았다고 하기엔 내게 셀럽들의 잇템이 많기는 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 끊임없이 더 멋지고, 더 새로운 아이템을 구비했고, 이걸 은근슬쩍 주변에 자랑하며 

' 같은 동네에 살아도, 내 딸은 너네들과는 달라. 그러니까 난 너희들과 다르다는 말이지.' 

라는 무의식을 동네 아줌마들에게 심어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의 기대에 걸맞게 어린시절 나는 엄마가 시키는 것을 뭐든 곧잘 따라했다. 

피아노, 그림그리기, 웅변, 서예, 영어말하기... 두시간에 한번씩 버스가 다니는 시골 아이가 배운 거라고 하기엔 어색할만큼 많은 것을 배웠고, 그땐 경쟁자가 많이 없어서였는지, 상도 정말 많이 받았었다. 

장관상,도지사상,교육감상... 상을 타올때마다 엄마는 뛸 듯이 기뻐했고, 그 주 주말에는 꼭 친척이나 동네사람을 불러 잔치를 했다. 

상을 타고, 칭찬을 받고, 잔치가 반복될 때마다 내겐 뿌듯함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언제까지 내가 엄마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지배했고,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그리고 두개의 면의 학생들이 모이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연히, 반 배치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국-영-수 반편성에서 심화반이 되었다. 

이때부터 엄마는 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공존했고, 나는 다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든 사춘기를 앓았다. 


문득 중학교 2학년이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엄마에게 반항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친구들과 미용실에 가서 그 당시 최신 유행했던 브릿지 염색을 했다. 염색이 끝나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 너 그 염색하고 집에 들어오면 엄마한테 뒤지게 혼날 줄 알아."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도 엄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브릿지를 한 채로 집에 가려니, 엄마는 내 방 안에서 씩씩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염색을 대체 왜했어? 학생이 머리에 염색하는게 말이돼? 집에오면서 사람들이 다 봤을꺼아냐. 동네창피하게 어떻게 다닐려고 그래? 당장 내일 풀러."

"지금 방학인데 왜 염색을 하면 안돼? 어차피 학교가면 푸를건데. 그냥 하고 다닐꺼야."

긴 시간 실랑이가 오갔고, 난 끝까지 염색을 안푸른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회초리로 내 엉덩이를 때렸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엄마가 다니는 아주 촌스러운 미용실에 가서 브릿지를 풀러야 했다. 

브릿지를 푸르는 것도 자존심 상했지만, 방학기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게 이해가 안됐고,통제받는 기분이 너무나 싫었다. 그때부터 난 엄마가 하는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집에와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자기의 분신이었던 내가 그렇게 밖에서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본인 결혼생활의 버팀목인 내가 망가지는 순간, 본인 스스로도 망가질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엄마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마다 난 회초리를 맞았다. 엄마는 내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맞는거라 회초리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런일이 반복될 때마다 엄마와 나의 사이는 한 간극씩 멀어져갔다. 

그리고 엽기적이게도 방황하는 사춘기를 보내면서도 성적은 떨어지지 않아서, 엄마는 모임이나 행사가 있어 밖에 나갈때면 입이 마르게 나를 칭찬했다. 

불과 어제 나에게 회초리를 들던 사람이 밖에 나를 칭찬하는 꼴을 보자니, 사춘기 시절 나의 방황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렇게 엄마의 영원한 버팀목이었던 나는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여전히 수재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도시로 고등학교에 갔다.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는 훨씬 더 큰 물이었고, 수재부터 날나리까지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이 있었다. 

시골 촌뜨기였던 나는 도시의 신문물에 정신을 못차렸고, 공부는 완전히 뒷전인채로 매일같이 친구들과 학교 끝나고 시내로 놀러 나갔다. 성적은 당연히 곤두박질 쳤지만, 엄마는 공부하라는 말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땐 딸이 더 나쁜길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불안감에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1년 반 만에 노는 일에 흥미가 떨어졌고,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나고부터는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성적이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내가 노느라 자랑할 것이 없었던 지난 일년 반동안 엄마는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도 않고, 그저 듣고만 있다가 왔던듯 했다. 

모임갔다 와서는 아빠랑 싸우는 일이 부지기수였는데,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성적이 오르는 것을 보니 또다시 나는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집에서는 서로 눈치보며 기싸움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소리지르며 싸우는 사이였지만, 밖에나가서는 쇼윈도 모녀지간이었던 엄마와 나. 


그렇게 나의 십대는 엄마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물들어갔다. 



-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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