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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보안관 Jul 20. 2020

쇼윈도 모녀는 아직도 현재 진행중

#2. 다름을 인정하고 나서야 알게되는 것들 

나의 대학 진학 동기는 좀 특별했다. 

물론 좋아하는 과목이 있기는 했지만, 엄마로부터의 "독립"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워낙 시골에 살았던지라 대학교를 가면서 "독립"에 성공했고, 엄마에 대한 나의 십대 시절의 반항은 그럭저럭 누그러 들었다. 

사실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다. 그건 나도 알고 아빠도 알고, 동생도 알았다. 

그리고 엄마를 아는 모든 사람이 알았다. 입이 마르도록 언제나 나를 칭찬하고, 나를 걱정하며, 나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핸드폰을 샀었고, (물론 내가 갖고 싶어했지만 엄마가 날 돌보려는(?) 의도가 컸다.)  독립을 한 대학시절까지도 핸드폰 지옥에서 살아야 했다. 

"밥은 먹었니?"

"오늘 기분은 어때?"

"지금은 뭐하고 있어?"

"집에 들어갔어?"

"비오는데 우산은 챙겼니?"

시도때도 없이 오는 문자는 나를 힘들게 했지만, 엄마와 함께 살면서 잔소리 육탄전을 듣는것 보다는 만오천배 나았으므로 그럭저럭 견뎠다. 

그리고 스물넷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스물 여덟에 결혼을 했다. 지금은 여섯살의 딸아이가 있다. 

딸아이를 키우다보니 신기하게도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 대한 대부분의 실마리가 풀려간다. 

엄마는 제 몸보다 소중한 딸을 한순간도 위험한(?) 순간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딸이 우주에서 가장 잘나게 크기를 그 누구보다 바랐을 것이다. 

지금 나도 저 두가지 마음을 똑같이 갖고 있다. 

그치만, 엄마는 엄마의 테두리 안에서 엄마의 시야에서 항상 지켜보는 것이 나를 위한 유일한 교육이자 인생철학이라고 믿었나보다. 그리고, 태생이 엄마와 다른 기질인 나는 누군가에게 구속받는 것을 격하게 싫어했다. 

애정이 과해 구속하는 엄마와 독립하고 싶은 딸. 

동시에 남들에겐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안정적인 관계를 보여줘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우리. 

그러기에 엄마와 나는 아주오랜시간 쇼윈도 모녀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게 아이가 태어난 직후까지도 엄마의 구속은 계속됐었다. 

산후조리를 하느라 두달 남짓 친정에서 지내던 동안, 나는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엄마가 내게 하는 대부분의 메시지는 

'산모에게 안좋으니 뭐뭐뭐는 하지마라.'

'아이에게 안좋으니 뭐뭐는 하지마라.' 

였다. 결국 주말부부여서 아이를 혼자 돌봐야했음에도 친정살이는 두달만에 끝이 났고, 엄마는 내가 신혼집으로 돌아가던 날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하지만, 나의 딸아이가 커가면서 엄마와 나의 관계도 조금은 달라져갔다. 

엄마는 자신과 다른 나의 양육방식에 놀라면서도 신기해했고,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엄마와 나의 "다름"을 천천히 인정해갔다. 

엄마는 아이에게 뭐든 새거를 사주고 싶어했지만, 나는 나름의 기준으로 중고물품과 새물건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엄마는 아이가 위험할까봐 주방 앞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지만, 나는 두돌무렵부터 아이를 요리에 참여시키고 있다. 그리고 엄마는 똑똑한 아이가 되길 바라며 어린 나에게 한글 영어 수학 피아노 등등 많은 것을 알려줬지만, 난 아직까지 아무런 사교육을 안하고 있다.


요즘은 엄마를 일년에 열번 미만으로 만난다. 명절에 두번, 생일과 어버이날, 그리고 계절마다 이따금씩.

가끔씩 친정에서 친정아빠와 내남편 그리고 아이가 함께 노느라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단둘이 있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다른 모녀처럼 인생사도 이야기하고, 육아이야기도 하고, 쇼핑도 함께하며 다정한 시간을 보내면 좋으련만.

이십년이 넘게 자리잡은 엄마와 나의 골은 그렇게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엄마와 둘이 있는 시간이 영 어색하다. 이런 나의 감정을 엄마도 당연히 의식하고, 내 앞에서는 필요한 말 외에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편해졌다. 

길고 깊었던 엄마의 욕망은 내가 자라면서 대부분 채워지기도 했고, 따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집에 김치가 떨어져서 엄마한테 카톡을 보냈다. 

묵은지와 시골 들기름을 좀 보내줄 수 있냐고. 

늘 그렇듯 엄마는 당연히 바로 보내줄 수 있다고 했고, 난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직도 엄마는 집밖을 나서면 내 자랑을 입이 마르고 닳도록 한다. 

좋은 회사에 가서, 결혼을 제 때해서, 아이를 제 때 낳아서, 아이를 잘 키워서..

내 존재 자체가 자랑인 우리엄마. 


작은 것에 기뻐하고 매일을 화려하게 살고 싶었던 소녀가 이십년이 넘는 긴 세월을 감옥같은 시골에서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엄마에게 보란듯이 나는 쾌적한 교통환경과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에서 살고 있다. 

이것 역시 엄마의 자랑이고, 엄마는 나의 이런 삶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그치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것이 서툴고 마음이 앞섰던 감정적인 엄마와 매사 생각이 많고 이성적인걸 중시하는 나는 기질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아직도 엄마와 나는 밖에 나서면 남들과 다름없는 모녀사이인 척 한다.

서로간의 깊은 상처가 평생토록 아물런지는 모르겠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나니 쇼윈도 모녀도 그럭저럭 할만하다.

그리고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엄마와 나는 서로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나의 1평짜리 서재에서, 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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