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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보안관 Aug 05. 2020

딸, 너를 키우며 매일 세상을 배워.

며칠 전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했다. 

한명은 싱글, 한명은 노키즈, 그리고 나. 

교육관련직종에 종사하는 친구들(정확히는 전직장 동료)이다 보니 자연스레 교육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각자의 자녀교육 철학이 오픈되어 카페에서 신나게 떠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자녀교육 철학의 시발점은 A의 조카로부터 시작되었다. 

A의 조카는 고1이다. 

그리고 인문계에서 공부는 하위권. 정확히는 꼴찌 근처에 가까운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다. 

A의 언니는 자기 딸의 성적 향상을 위해 매월 120만원의 학원비를 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A는 그 학원비가 아깝지 않게 조카가 열심히 해줬음 하는 바람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공부말고 다른 적성을 위해 투자하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집에와서 남편과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삼십년을 넘게 살아보니, 자녀교육의 핵심은 두 가지로 추려졌다. 


첫번째, 내 자녀는 어떤기질의 사람인가?를 살펴볼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내 아이를 예로 들자면, 이 아이는 미술활동을 굉장히 좋아한다. 음악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운동신경은 없다. 

음악을 듣는건 좋아하지만, 악기 연주에 많은 흥미가 있지는 않다. 

가족들 앞에서는 한없이 까불지만, 밖에서는 낯가림이 매우 심해서 유치원 선생님께 인사도 잘 못한다. 

아직 어려서 정리정돈을 잘하진 못하지만, 깔끔한 상태를 좋아해서 본인 옷이나 손 등의 청결에는 굉장히 신경을 쓴다.라는 식이다. 

아이의 기질을 알아야 교육 방향에 대한 견적(?)이 대략적으로나마 나오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내 아이의 기질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시류를 읽는 것이다. 

너무 식상하지만, 라떼만 해도..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가서 삼*에 취직하거나 사법고시를 보는 것이 문돌이의 성공한 삶을 사는 지름길이었다. 

나역시 시류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남들이 다 하는 공부를 어지간히 한 죄로 어지간한 회사에 입사했었으니.

그런데 어지간한 회사에 입사해서 어지간한 삶을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순간 시류가 확! 바뀌어 있었다. 

페이스 아이디로 송금을 하고, 어젯밤 11시에 주문한 물건에 다음날 아침 6시에 오는 세상.

자동가 자율주행을 할 수 있고, 인류와 AI의 바둑대결이 가능한 세상에서 내 아이가 내가 했던 방식대로 커가는 게 맞을까. 


아주 다행스럽게, 남편과 나는 이 두가지에 대한 딱맞는 공감대가 있고(아직까지는), 그래서 아이에게 사교육을 접하게 하는 기준이 있다. 

첫번째는 가정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주자. 

이를테면, 우리부부는 예체능을 집에서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예체능에 대한 사교육은 언제든 환영이다. 물론 내부적인 세세한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두번째는 95%가 하는 교육은 사교육없이 배울 수 있도록 해주자. 

여섯살쯤 되면 또래의 대부분이 하는 교육이 있다. 한글,산수 학습지. 내가 어린시절에는 "눈높이"라는 브랜드가 학습지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학습지를 하게되면 한글을 읽고 쓰는 것,  유치원생이면 훌륭한 수준의 두자릿 수 덧셈뺄셈 (뭐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등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두가지는 각자의 속도는 다를 수 있지만, 배우기 위해 대단한 기술이나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모국어를 읽고 쓰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먹고 살기 위해 산수는 필연적이다. 


이 두가지 철학의 교집합으로 내 딸은 현재까지는 발레만 배우고 있다. 

집에서 가르쳐줄 수 없고, 자세교정에 탁월한 운동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들고 말이다. 

그런데, 두런두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 생각이 과연 언제까지 흔들림없이 갈 수 있을까 싶었다. 

유치원때까지는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열심히 예체능을 배우다가 초등학교 삼학년 정도부터는 갑자기 너나할 것없이 국영수에 매진하는 것을 수도없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왜 다들 이렇게나 열심히도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자식이 제일 예쁘고 제일 똑똑하고, 계속 그렇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학교라는 서열화 된 집단에 속하게 되면서 자유롭고 창의성 있는 내 자녀를 원하면서도, 이 자녀의 오십점짜리 시험 답안지를 너그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프로나 될까 싶다. 


결국 사교육에 이렇게나 매진하는 이유는 부모의 배짱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결론에 이르다보니, 나도 남편도. 우리가 현재까지는 이렇게 나름의 탄탄한 논리가 끝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주 미안이야기지만,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부모들이 남들을 따라가기 위해 별생각없이 사교육에 열성이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과 자녀의 인생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나도 내가 언제까지 저 확고한 철학을 고수하면서 살런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비단 사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매일매일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채우고 또 채우면서 오늘도 나는 인생을 조금씩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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