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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Feb 10. 2022

핸드폰 속 실장님은 거래처 실장님이 아니었다

"자.. 자.. 잠깐만..

아니 형부는 아들 이름을 그대로 저장해 놨어?

ㅎㅎㅎㅎ아니.. 이렇게 저장해 놓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ㅋㅋㅋㅋ

그럼.. 언니는 뭐로 저장해 놨어?"


와이프 친한 동생이 내 핸드폰 화면에

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권혁 0'이라고 뜬 걸 보고 놀란 듯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댄다

아들 이름을 '권혁 0' 이름 석자를 입력해 놓은 사람은 아마 대한민국에 형부 혼자일 거라고 핀잔을 준다


나는 내 핸드폰에 모든 전화번호가 이름 석자로 저장해있다



아들도.. 와이프도.. 형도.. 누나도...

심지어 엄마도 모두 이름 석자가 입력돼있다

친구들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특이하다는 얘기를 몇 번 들은 적은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왕비" 또는 "보물 1호"라던지 자기만의 표현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식의 입력방법을 택하곤 한다


나도 처음부터 이름 석자를 입력해 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입력해 놓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헷갈림의 횟수도 함께 늘어갔다

내가 이름 석자를 입력해 놓는 데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야흐로 15년 전쯤 술을 한창 마시고 다니던 바쁜 시절이 있었다

핸드폰의 그룹을 나눠 놓는 기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술집 전화번호를 많이 알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말이야~하며 여러 곳의 술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게 마치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받은 수많은 훈장을 늘어놓듯

으스대던 때가 있었다

술 마신 다음날엔 전날 받은 술집 명함을 꺼내

핸드폰에 입력하고 명함은 사무실 서랍에 모아 두었다

와이프가 혹시나 볼까를 대비해 상호는 쏙 빼고 저장 이름을 마담에서 실장으로 변경하여 저장해 두었다

김 00 실장님, 이 00 실장님, 최 00 실장님...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핸드폰에 저장해있는 실장님도 늘어갔다


하루는 거래처 사장님들을 접대할 일이 있어

예약을 하여야 하는데 도무지 그곳 상호와 마담의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김실장?.. 이실장?.. 하하.. 이걸 다 전화해 볼 수도 없는 난감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접대문화도 시들해질 무렵

밤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나의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모두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오빠앙~~~~"

"잘 못 거셨습니다.. 뚜뚜뚜뚜뚜...."


"누군데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해?"

"김 00 실장님?.. 김 00 실장이 동생이야?"

"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이렇게 김 00 실장은 거래처 실장이 아님이 들통나고 나의 핸드폰에 실장은 모두 강제 삭제되었다


그 뒤로도 잔머릴굴려 인텔 김 00 부장님..

엔비디아 이 00 상무님으로 몇 번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것 또한 헷갈려 몇 번을 해보다 포기했다


그렇게 술집을 모두 정리하고 지금은 새 사람이 되어 정확히 이름 석자만 입력해 놓는다


나의 핸드폰의 이름 석자의 숨은 속사정은 웃픈 일이지만...

이따금 실장님이 그리울 때가 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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