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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Dec 01. 2022

이런 것도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연탄을 본 적 없다는 아들과 온수매트가 신기하다는 엄마

아들이 중학생쯤 됐을 때였나?

tv를 보다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혁창아.. 너 연탄이 뭔 줄 아냐?"

"알지.. 쥐포 같은 거 구워 먹을 때 쓰는 시커멓게 생긴 구멍 송송 뚫린 거 아냐?

아빠는 아빠 아들이 바본 줄 아는 거 아냐?"

"...?"


"연탄 본 적은 있냐?"

"본 적 있지~"

"네가 연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해 보니 아들을 어려서부터 데리고 다닌 신촌에 있던 서서갈비에서 연탄을 본 적 있겠구나 싶었다

그 집은 오래전부터 소갈비를 연탄에 구워 파는 집으로 유명한 집이었다


그렇다 해도 온전한 연탄의 모습은 본 적이 없고

더더군다나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는 왜 하얀색인지조차 이해 못 하고 그걸 본 적은 더더욱 없다는 말에 적잖이 놀란 건 사실이다


어떻게 연탄재를 몰라? 그런 아빠의 말에

나무가 타면 하얀 숯이 되지만 그 숯이 식고 나면 다시 검은색이 되지 않느냐고 따져 묻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두 발을 뻗고 자다가도 다시 움츠러드는 건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가 아닐까 싶다



1983년 1월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콧구멍이 쩍쩍 달라붙어 한참이 지나야 코로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맹렬했던 한파가 몰아 닫친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일이었다

어른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누군지 모를 한 아저씨의 바지춤을 잡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본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엎어져 있는 두 남녀가 보인다

머리 위로는 탁해 보이는 물이 반쯤 담겨있는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가 놓여있다


추운 겨울에 내복 바람으로 미동도 없이 땅바닥에 코를 처박고 있는 모습을 한 두 남녀

나는 이 광경이 무슨 일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웅성거리는 어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어른들 옆으로 다가갔다


"아휴~이를 워째"

"신혼부부가 이게 웬일이랴"


땅에 코를 묻고 있던 건 흙냄새를 맡으면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고 동치미 국물은 연탄가스를 맡은 사람에게 먹이는 민간요법으로 두 남녀를 살려보려고 애쓴 흔적으로 예상되었다

그런 동네 어른들의 노력에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는 자다가 연탄가스를 맡아 그날 두 명 모두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본 연탄가스를 맡고 죽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통통했던 처마 끝 고드름도 봄 햇살에 수줍은 듯 홀쭉하게 다이어트를 한 모양새다

아직 땅이 다 녹지 않아 돌덩이 같은 흙을 파내느라 곡괭이 소리가 요란하다

동파로 터진 수도 공사를 하느라 집집마다 여기저기 땅을 파헤쳐놨다


우리 집도 봄 준비에 한창이다

공사라고 해봐야 방바닥 장판을 걷어내고 금이 간 시멘트 바닥을 땜질하는 수준의 공사였지만

지난겨울 동네에서 일어난 연탄가스 사망사고로

동네 사람들 모두 갈라진 방바닥 틈을 매우는 공사들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내일 모래면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지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없애기엔 4월까지도 연탄을 때야 했다


추워 죽겠는데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면 하지 왜 지금 하느냐는 내 말에 연탄가스가 올라와 안된다며 옷 껴입고 며칠만 참으라는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시골 구분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한 반에 2~30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는다고 하지만

1980년 초만 해도 한 반 친구들의 출석번호가 60을 넘어 70에 가까울 정도로 정말 다닥다닥 붙어 앉아 꼭 콩나물시루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엔

학생들이 포화 상태가 되어 오전반 오후 반으로 나눠 등교를 하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은 3월 신학기가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은 오후 반이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는 날로 기억한다

형과 누나는 고학년이라 아침에 모두 등교를 하였고 나는 아침이 되었지만 오후에 학교 가는 걸 엄마도 알고 있었기에 일찍 깨우질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땐

나를 안고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과 파란색 커튼이 처져있는 응급실 침대의 모습이었다

방바닥 실금을 매우는 공사를 하였지만 시멘트가 마르기도 전에 불을 때는 바람에 함께 자고 있던 엄마 아빠는 괜찮았지만 아랫목에서 자고 있던 나는 연탄가스를 맡아 응급실로 실려오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일이 꿈인 듯 생각이 또렷이 나진 않지만

그날이 바로 국민학교 3학년 개학식 날 연탄가스를 맡아 처음으로 개근생을 못 탈 뻔한 날이었다

요즘의 생활 수준으로 비교하면 기가 막힐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에서 기름보일러로 바꾸는 큰 공사를 하였고

겨울이면 천장 높이까지 쌓여있던 연탄이 있던 자리는 200리터가 넘는 커다란 기름보일러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도 새벽마다 일어나 연탄불을 갈지 않아도 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쓰레기차에 실어 나르던 연탄재 옮기는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는 엄마를 위해 올봄에 침대를 사드렸다

처음 써보는 매트리스가 아직까진 불편하신듯하다

혼자 계시다 보니 난방도 잘 안 하시고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처음 맞는 겨울이 걱정이었다


"엄마 보일러 하나 놔드릴까?"

"보일러가 있는데 무슨 보일러를 또 놔"

"아니.. 바닥 보일러 말고 침대 위에 놓는 보일러"

"에이 그런 게 어딨어 괜히 쓸데없이 돈 쓰지 마"



매트리스가 너무 푹신하여 조금 불편함이 있었는데 매트형으로 사드렸더니

침대도 푹 들어가지 않아 더 좋다고 하신다


그 옛날 연탄가스를 맡은 막내아들을 안고 울고 계시던 엄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한방에서 같이 잤는데 어린 아들만 연탄가스를 맡아 평생을 미안해하셨던 엄마!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이방 저방 연탄을 가는 엄마의 모습이 항상 안쓰러워 보였던 열살짜리 막내아들의 시선도 이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그 옛날의 추억이 돼 버렸다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다는 건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옛날 엄마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공유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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