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짜증이 나와버렸다는 건, 가득 차 있어 무엇인가를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다는 것. 마음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차 있는 상황에서는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은 흐려진다. 해내야겠기에 여러 일들을 벌여 놨는데 진척이 없이 조바심이 들고, 조바심 때문에 복잡해진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일들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사서 걱정하기에 또 말려들고 말았네. 자신을 탓하다가 멈추지 못하는 손의 땀을 보고 정신이 든다. 버티고 버티다 한약을 지어왔는데 아직까진 소용이 없다.
이것도 해봤다가, 저것도 해봤다가 아예 닫아 버렸다가 참을 수 없이 가슴이 꽉 막히는 순간이 오면 걷는다. 그럴 땐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걷는 것밖에 없기도 하거니와 오래 갇혀 있던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담길 땐 미운 나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가끔은 쓰고 싶은 문장들이 떠올라 메모장을 켜고 기록한다. 그럴 때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포착된다. 매일 걷는 길인데 때로는 너무 낯설어 놀랐다가, 내가 놓치고 사는 것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무얼 그렇게 움켜쥐고 살고 있나, 다 무슨 의미인가 한참을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주 걸어도, 금방 잊는다.
마음을 먹고 쉬지 않으면 제대로 쉴 수도 없는 세상. 내가 나를 채우는 욕심도 문제지만, 듣고 싶지 않은데 들리거나, 보고 싶지 않은데 보이는 것들도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온갖 종류의 문제들로 가득 찬다. 넘쳐서 갇혀버리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기, 그러기 위해 오늘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