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쁠 땐 소음, 멈추면 소리
처음 며칠은 그저 쉬는 날 같았다. 알람을 끄지 않아도 몸이 먼저 깼고, 침대 끝에 앉아 시계를 봤다. “지금쯤이면 주문 확인했을 텐데… 컵 재고 체크하고… 프리오더 빠뜨리진 않았나…” 몸은 멈췄는데, 생각은 아직도 관성으로 달렸다.
진짜 실감은 마지막 급여를 받으러 간 날에 왔다. 동료들과 웃으며 인사를 하고, 사장님과 짧게 말을 섞고, 봉투를 손에 쥐고 나와 문을 닫았다. 그제야 마음 한쪽이 뒤늦게 울었다. 후회인지, 아쉬움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앞날에 대한 두려움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길 위에서 아주 조금, 눈물이 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평소라면 고르지 않을 비싼 사시미 세트와 사케를 샀다. ‘오늘만은’이라는 핑계로. 술을 끊고 오래 버텼지만, 이번엔 다르게 마시고 싶었다. 가장 작은 잔에 한 모금씩만. 화면을 켜지 않고 입안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사시미는 과장 없이 신선했고, 사케는 맑고 가벼웠다. 한동안 창밖 가로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간을 보지 않고, 마음이 내킬 때까지 밤을 보냈다.
첫 직장을 떠날 즈음의 나는 몸도 마음도 이미 바닥이었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유리잔에 따를 힘도 없어 위스키 병에 빨대를 꽂았다. ‘심야식당’ 두 편을 잇달아 보며 홀짝였고, 마지막에 ‘후루룩’ 소리가 났다.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 처음 진짜로 무서웠다. 자리도 치우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그날 이후로 술을 끊었다. 그래서 오늘의 사케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속도 조절이었다. 한 잔을 길게, 아주 천천히.
다음 날, 알람 없이 또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에 가장 먼저 허리가 나를 붙잡았다. 바로 일어나지 못해 심호흡을 몇 번 길게 내보내고, 침대 옆 난간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유리컵을 드는 손목도 욱신거려 결국 머그컵으로 바꿨다. 이상하게도 커피를 내리는 자세만 취하면 통증이 가장 컸다. 어쩌면 그 신호들을 내가 소음으로 치부해 왔는지도 모른다.
부엌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루틴의 그림자가 습관처럼 따라왔다. 커피 원두 주문, 컵 수량, 프리오더 확인… 해야 할 일도 아닌데, 해야 하는 일처럼 머릿속에 줄을 섰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와 뒤섞인 정체 모를 냄새가 옅게 흘러나왔다.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손은 멈추고, 시선만 선반 사이를 왕복했다. “나중에.” 문을 닫았다. 오늘 처음 닫은 문이었다. 공백이 잠깐 공허처럼 느껴졌지만,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의 멈춤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이라고.
점심 즈음 빨래를 분류하다가 유니폼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빨아둘 필요가 없는데 습관처럼 흰 것, 진한 것 따로 나눴다. 킁킁—커피 냄새는 내가 내릴 때 맡던 향긋함과 달랐다. 약간 기름쩐 내 같기도, 옅은 우유 비린내 같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흘리고 다녔나 싶다가, ‘이제 버스에서 바리스타를 냄새로도 알아볼 수 있겠다’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이 냄새는 세탁을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손에 든 유니폼을 종이봉투에 따로 넣었다(폐기). 끝이라는 표식을 붙이듯, 봉투 입구를 접어 누르자 마음 한쪽도 접혔다. 빈자리가 생기니 다음 순서가 보였다.
세탁기가 둥글게 돌아가는 동안 소파에 기대 눈을 붙였다. 몇 시인지 모른 채 깼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오후,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번엔 아침과 달랐다.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상해가기 직전의 것들부터.’ 손이 먼저 움직였다. 가장자리가 물러진 채소, 날짜가 가까운 소스, 부피를 차지하는 용기. 우선순위가 생기자 냉장고는 지도가 됐다. 아침에 닫았던 문이, 오후엔 길 안내를 시작한 셈이었다.
싱크대에 도마를 놓고 남은 채소 몇 가지를 다졌다. 칼날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규칙을 만들었다. 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먼저 숨이 죽을 것부터 넣었다. 소금 한 꼬집, 물 한 숟갈. 거창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오늘 내게 필요한 만큼의 온기였다. 접시를 들 때 손목이 다시 신호를 보냈다. 이번엔 무시하지 않고 잠깐 멈춰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들었다. 바쁠 땐 신호가 소음이 된다. 멈추면, 소리로 들린다. 이 깨달음은 같은 하루 안에서도 두 번, 나를 일으켰다.
오후에는 유니폼 봉투를 현관 옆에 내려두고, 창문을 반쯤만 열어두었다. 바깥공기가 얇게 들어왔다. 종일 집 안의 소리를 배경으로 살았다. 세탁기 드럼이 규칙적으로 도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칼과 도마가 맞부딪히는 소리. 아침의 ‘모르겠는 냉장고’와 오후의 ‘지도가 된 냉장고’ 사이에 마음의 자리가 아주 조금 생겼다.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도, 오늘의 끝은 어제보다 덜 복잡했다.
해가 기울 무렵, 스트레칭을 몇 동작했다. 늘렸을 때 당기는 부분이 어딘지 천천히 확인했다. 아픈 쪽을 피하지 않고, 잠깐 머물렀다. 숨이 길어졌다. 걱정들도 줄을 섰다. 다음은 어떻게 할 건지, 통장은 얼마나 버틸 건지, 비자는 언제까지였는지. 모른 척하지 않되, 한 번에 다 해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오늘의 공백을, 공백으로 남겨두겠다고.
잠들기 전, 노트를 펼쳐 몇 줄을 썼다.
“멈춘 자리에 자리가 생긴다.”
“아침엔 닫았던 문을, 오후엔 지도로 펼쳤다.”
“버린 것들 사이에, 남기고 싶은 하루가 생겼다.”
불을 끄니 내 숨, 세탁물 마르는 냄새, 멀리서 지나가는 차 한 대의 소리만 남았다. 문을 닫아야 들리는 소리들이 있다. 가게의 문이든, 관계의 문이든, 냉장고 문이든, 하루의 문이든. 특별한 건 없었지만, 오늘의 소리들은 내 쪽으로 또렷했다. 그게 전부였고, 그래서 충분했다.
독자에게: 당신의 멈춤은 어떤 소리였나요?
미숙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1화부터 3화까지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분 한 분의 공감이 더해가는 알람을 받을 때마다 정말 벅찬 기분을 느낍니다. 보내주시는 따뜻한 피드백은 배우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음 4화부터는 연재 요일에 맞추어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