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마무리하고 떠나는 법

작고 단단한 예의 지키기

by 핑크 바게트

하지만 나는 끝까지 예의를 지켰다.


결심은 단호했지만, 습관은 나를 오래 붙잡아 두었다. 좋은 직원으로 떠나기는 이미 어려운 일 같았고, 최소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아니, 아마도 뒤에서 욕먹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겁이 많고, 조금은 비겁한 나의 침묵이었다.


인수인계 요청을 받던 날, 가슴에 무거운 것이 ‘툭’ 하고 내려앉았다. 잠깐 대신해 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을 완전히 넘기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정말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낯설고 서글펐다. 흔들려 돌아갈까 봐, 혹은 이런 표정을 들킬까 봐, 나는 오히려 더 밝게 지냈다.


나처럼 비자를 지원받아 일하던 동료가 그 일을 맡았다. 임금이 오르는 것도 아닐 텐데 책임만 늘어났을 것이다. 그분은 묵묵히 설명을 들었고, 내내 같은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요.”

돌이켜 보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 불안을 덜어주던 그 태도에, 이렇게라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날 밤, 오래 꺼내지 않던 노트북을 켰다. 업데이트 창이 몇 번이나 떴다. 새삼 업데이트가 필요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를 열고 내가 해온 일들을 마구 적어 내려갔다. 재고 파악과 주문, 커피빈 관리, 프리오더 정리 후 키친팀 전달, 현금 팁 정리, 신메뉴 개발, 커피머신 관리, 품질 관리…. 줄줄이 쏟아진 목록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여태 여기서 어떻게 버텼는지, 이 줄들이 다 알고 있다고.


정리는 곧 기록이었다. 날짜와 우선순위를 붙여 폴더를 정리했다. 솔직히 다음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지켜주길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덜 헤매도록 다리를 짧고 튼튼하게 놓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나의 미련—나는 여기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을 조용히 문장으로 남기고 싶었다.


오랫동안 붙잡고만 있던 레시피 문서도 마무리하기로 했다. 현실의 무게는 감정의 승리보다 무거웠다. 레시피는 내 소유로 계약된 바 없었고, 재료는 모두 가게에서 구매했었다. 무엇보다 영주권이 불확실한 이민자로서 괜한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는 없었다. 이미 ‘문제 있는 직원’으로 기록된 나에게, 작은 위험조차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안전한 마무리를 택했다. 미련과 복수심 대신, 평온하게 떠날 수 있는 길을.


그날, 나는 디지털 파일 대신 손으로 쓴 레시피 메모를 꺼냈다. 서랍 깊은 곳, 가장 은밀하게 보관했던 종이였다. 솔직히 재료와 비율만 적어 최소한의 정보만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온도와 끓이는 시간, 인덕션 단계까지 펜으로 다시 눌러 담았다.


글씨를 쓸 때마다, 내가 퇴근 후 남아 공들였던 시간의 흔적이 종이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 열정은 ‘음료 레시피’ 이름표를 붙인 종이 뭉치가 되었다. 내 열정이 끝내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씁쓸함이, 잉크 냄새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내려왔다.


마지막 주가 되었다. 스케줄 표의 마커를 지우고, 에스프레소 머신 안쪽까지 닦았다. 뜨거운 스팀이 가라앉고, 금속 표면이 서늘해질 때, 손바닥에 남는 미세한 물기. 몸은 오래전부터 쉬자고 말했지만, 습관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근무 날. 모든 정리를 마친 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작은 금속 조각이, 카운터 위에 ‘툭’ 놓이는 순간, 커다란 정적이 찾아왔다. 더 이상 이 문을 내 손으로 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이곳이 이제 완전히 내 공간이 아니라는 낯섦이 동시에 밀려왔다. 손끝에 남은 차가운 감각이 오래갔다.


문 닫힌 가게를 나와 밴쿠버의 거리를 걸었다. 세제 냄새가 조금 배어 있는 외투, 여전히 남아 있는 생활비 걱정과 비자 연장 고민, 그리고 천천히 욱신거리는 손목. 가벼워진 건 작업대였고, 무거워진 건 알 수 없는 내 어깨였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아주 조금 비어 있었다. 후련함이라기보다, 멈출 수 있는 빈자리만큼의 고요.

정리의 끝에서야, 나는 비로소 시작된 것 같았다.

작고 단단한 예의를 지킨 채로.


[덧붙임: 나처럼 정리하는 당신에게]


나는 가게를 위해 인수인계 문서를 완벽히 만들었지만, 내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경계는 끝까지 흔들렸다. 마지막 날까지 마커를 지웠던 건, 가게의 안녕 때문만이 아니라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미련이기도 했다.


‘잘 정리하고 떠난다’는 건, 다음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예의와 더불어 자기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다. 나는 그 용기가 부족했고, 그것이 내가 이별을 고한 밴쿠버에서의 첫 직장에서 배운 가장 쓰라린 정리의 기술이다. 이 쓰라린 기술의 결론은 이것이다.


완벽히 정리하지 못해 다음 사람이 불편하더라도, 내가 무너지면서까지 모든 책임을 지려 하지 말 것. 나를 지키는 선을 긋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잘 정리하는 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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